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0년 4월 3일 (금요일) D10 기획 19997년 ‘빨간 마후라 사건’, 피해자는 어떻게지워졌나 1997년 7월 11일MBC 뉴스는 ‘10대가 직접출연해서 만든 음란 비디오가 서울 시내중고등학교에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비디오엔 14세여중생 A양과 17세남고생 2명이실제성관계를 나누는 장면이 담겼는데, A양이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기때문에 ‘빨간 마후라’ 사건으로 알려졌다. 해당 비디오는 남학생들이일방적으로 촬영하고 유포했지만 잇따른 언론 보도 속에서여중생은 단 한 번도 ‘피해자’로 호명되지 않았다. 이후 한국성폭력상담소 면담을 통해 A양이가출 청소년이었으며비디오 촬영이전에 4명의남성들로부터 성폭행피해를 입은 상태였다는 것이뒤늦게밝혀졌다. 그러나 남학생과 여학생모두 똑같이소년법상 보호처분을 받았다. 음란한 영상을 ‘함께제작했다’는 이유였다. “여성 청소년이성적으로 착취당한 사건이한낱 ‘10대들의음란한 행위’로 축소된 거였죠. 다들 ‘10대의믿을 수 없는 일탈적 행동을 어떻게 단속할 것인가’에만 열을 올렸습니다.”(김주희, 이하 ‘김’) 방송 보도 이후 피해자 A양이등장하는 비디오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앞에서는 혀를 끌끌 차면서뒤에선 이비디오를 구하겠다고 모두가 혈안이돼있던 거죠. 영상을 보겠다고 달려든 ‘성인 남성’들은 끝내가해자로 불려나오지않았습니다.”(권김현영, 이하 ‘권김’) 이들은 ‘n번방에입장한 관전자들’의원형이었다. 이때부터개인 간의성관계장면을 촬영한 비디오가 용산 전자상가나 종로 세운상가 일대에서본격적으로 거래되기시작한다. 피해자의이름을 따서불린 2000년대 ‘OOO 비디오’ 가정용 인터넷이본격적으로 보급되기시작한 1999년엔 여성방송인 B씨가 자신의전연인과 성관계하는 장면이 동영상 파일로 인터넷에 유포되면서논란에휩싸였다. 당시 B씨는 비디오를 입수한 가해자로부터 “당장 1억원을 보내지않으면 비디오를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당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연예매체들은 앞다투어선정적인 중계에뛰어들었다. 피해자 B씨의실명을 공개하는 것이대단한 특종인양 1면에보도한 신문도 있었다. B씨는 결국 연예계를 떠났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가수 C씨가 과거에찍힌 성관계 비디오가 유출되면서가요계를 떠났다. B씨가 자신의 일터로 다시돌아오기까지는 10년이걸렸고, C씨도 공백기 3년을 보내야 했다. 당시영상들은 피해자의이름을 그대로 딴 ‘아무개 비디오’로 불렸다. “사건의명명자체가 2차 가해였던 셈이죠.‘불법촬영물’이라는 개념이전에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조차 생기기전이었으니까요.”(권김) 수사기관 방치속에 16년 건재했던 100만명의 ‘소라넷’ 1999년 등장해 2016년 완전히폐쇄되기까지약 17년간 한국 인터넷역사에검은 한 획을 그은 ‘소라넷’은 ‘성매매 후기사이트’로 첫발을 뗐다. “소라넷의성매매후기는 단순히 ‘어디를 다녀왔다’ 수준이아니었어요. 업소 여성들을 일종의 ‘캐릭터’로 등장시켜품평하고 이들과 가졌던 성관계의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등 일종의 ‘야설’로 발전시킨 형태였죠.”(김) 2000년대중반을 지나며소라넷은 ‘불법촬영물’이 대규모로 유통되는 ‘플랫폼’으로 기능하게된다. ‘국산 야동’이라는 신조어도 여기서등장했다. 초창기피해자는 주로 성매매업소 여성들이었지만, 이내지인이나 여자친구 등 일반인도 그 대상이됐다. 대부분 상대방의동의를 받지 않고 몰래찍은 영상이었다. 소라넷은 2006년 국내최초로 유해 사이트로 지정됐다. 수사기관은 이전 10년간 “서버가 해외에있어잡지 못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2016년 폐쇄 당시, 소라넷의회원 수는 무려 100만명. 공동운영자 6명 중 3명이검거됐는데 처벌받은 이는 송모(47)씨 1명뿐이었고 범죄수익추징금은 0원이었다. 수요가 있는 한 공급은 사라지지않는다 소라넷에서몸집을 불린 ‘불법촬영물 시장’은 소라넷이 폐쇄된이후에도 사라지지않았다. 콘텐츠가 ‘웹하드’안에서 고스란히살아 남았기때문이다. 2018년 10월 웹하드 업계 매출 1위 ‘위디스크’의양진호 대표가 전직직원들을 폭행한 혐의로 여론의도마에오르면서세상에알려졌다. 웹하드 업계는 ‘단순 음란물’이라고 부를 수 없는 각종 불법 촬영물을 조직적으로 유통시켜돈을 벌었다. 지난해 10월엔 미국, 영국 등 32개국이공조 수사해 검거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유포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가 한국인 손정우(24)씨라는 사실이밝혀지기도 했다. 손씨는 초범이라는 이유로 1심에서집행유예로 풀려났다가 2심에서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았다. 법원은‘나이가 어리고 갓 결혼한 가장’이라는 점도 참작했다. 손씨는 다음 달 출소를 앞두고 있다. 이제는 이유구한 실패의역사에마침표를 찍을 때 그간 ‘시늉에그친 처벌’은 성범죄로 돈을 버는 ‘시장’의 성장 토대가 됐다. “‘조심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기교육해 온 거죠. 그렇게 성범죄자들을 열심히길러내온 겁니다.”(권김) 불법촬영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자뿐 아니라 소지한 자도 처벌해 달라는 목소리는 끊이지않고 나왔지만 이내 묻혔다. 2018년 유튜버양예원의스튜디오 불법촬영폭로 사건이나 2019년 방송인정준영의 ‘단체카카오톡방’ 사건이터졌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빨간 마후라, 연예인 비디오, 소라넷, 웹하드, 김학의, 장자연, 버닝썬까지$ 제때 매듭짓지않아 꼬이고 꼬인 결과가 오늘날 ‘n번방’의모습으로 당도한 겁니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 다음이뭘까, 상상하고 싶지않을 정도로 끔찍해요. 20년 넘게이어져온 디지털 성범죄의 사슬을, 이번엔 반드시끊어내야 하지않을까요.”(권김) 박지윤^김주영기자 문소연^이동진인턴기자 그래픽=강준구기자 참사는징후없이닥치지않는다. ‘n번방’ 참사도그랬다.텔레그램이전에 손정우의 ‘웰컴투비디오’와정준영의 ‘단톡방’이있었고,이전에양진호의 ‘웹하드카르텔’이, 그전엔100만회원을거느렸던 ‘소라넷’이있었다. 뿌리를찾아더거슬러올라가면2000년대여성연예인들의 ‘성관계 비디오’ 유출사건을거쳐1997년 ‘빨간마후라’ 사건까지닿는다.그래서 ‘n번방’은 ‘n번째’ 참사다.알지못하는곳에서얼마나무수하게반복됐는지가늠조차할수없는, ‘n번’은 그야말로미지의숫자다.각각의사건들은서로연결돼있다.매번 ‘새롭다’고여기지만껍데기만조금씩진화했을 뿐 ‘여성착취’라는본질은달라지지않았다.한국일보뷰엔 (View&) 팀은권김현영여성주의연구활동가·김주희 서강대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연구교수와함께23년에걸친 ‘성착취’오욕의역사를되짚었다. 1997년7월MBC가보도한‘빨간마후라사건’방송장면중일부분.당시 보도는 10대들의일탈행위에만초점이맞춰져있었을뿐성범죄피해자 보호는고려가되지않았다. MBC뉴스홈페이지캡처 2019년3월성관계동영상을불법^촬영유포한혐의로구속된가수정준 영이서울종로경찰서에서검찰로송치되고있다. 연합뉴스 지난달25일미성년자를포함한여성들의성착취물을제작및유포한혐 의를받고있는박사방운영자조주빈(25)이서울종로경찰서에서검 찰로송치되고있다. 고영권기자 ‘성착취공화국’ 오욕의역사 얼마나더많은 n에분노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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