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0년 5월 26일 (화요일) D4 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한 형모 ( 1917~1999 ) 감독은예술성을 추구하는 작가주의감독은 아니었 다.동시대에활동했던김기영과유현목,신 상옥과같은감독들이사회를다루는정치 적인관점이나영화의형식미를 중시한 작 가였다면,그는‘예술가가아닌비즈네스맨 타잎’ ( 영화잡지영화세계1955년 12월 ) 으 로영화의오락성에복무하는철저한상업 영화감독이었다. ‘자유부인’ ( 1956 ) 으로대표되는그의영 화에는 당대부터‘대중에영합’하는 ‘저속’ 한작품이라는꼬리표가따라다녔다.하지 만그는비평의시선을개의치않았다.스스 로대중영화감독이라칭했고선정적인요 소를부각시키는데거리낌이없었다. 통속 물로일관했지만장르의개척과기술혁신 으로영화산업의대중적저변을넓혔고,이 후찾아올중흥기의기반을다졌다는점에 서그의의는결코작지않았다. 친일영화로 이력시작 오명도 만주신경미술학교에서공부한 한 감독 은 백화점간판 그리는일을생계삼았다. 뒷날 ‘순애보’ ( 1957 ) 에서그림소품을손수 그릴정도로미술에재간이있었던그는형 의친구로‘수업료’ ( 1940 ) 를찍던최인규감 독을찾아갔고,‘집없는천사’ ( 1941 ) 의미 술감독이그의첫영화 경력이되었다. 그 후최감독의알선으로일본에건너가도호 영화사에서실무를익힌한감독은 2년뒤 촬영부문의기능시험에합격해합격자에 게주어지는,영화 한편은찍을 분량의공 짜필름을들고돌아온다.이무렵최감독 은더는친일영화를작업하지않겠다며영 화에서손을 놓고있었지만, 한 감독의설 득으로 다시연출에복귀한다. 한 감독은 그 밑에서참전 선동영화인 ‘태양의아이 들’ ( 1944 ) ,‘사랑과맹서’ ( 1945 ) 의촬영감독 을맡았다. 해방이후에도두사람의협업은계속된 다.최감독은 ‘자유만세’ ( 1946 ) 와 ‘죄없는 죄인’ ( 1948 ) 으로친일전력을세탁하며민 족영화 감독으로 변신했고, 한 감독의카 메라가 뒤를 따랐다. 유학파 출신으로영 화 기술에능통했던 그는 당대에한국영 화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혔고 안진상 감독의‘여명’ ( 1948 ) , 윤용규감독의‘마음 의고향’ ( 1949 ) 에서도 촬영감독으로일하 게된다. 한감독의연출데뷔작은여수순천반란 사건을배경으로한 ‘성벽을뚫고’ ( 1949 ) 였 다. 홍개명감독의‘전우’ ( 1949 ) 와 더불어 국책반공영화의효시로꼽히는이영화는 ‘조국을지키는청년의애국심을그린일종 의전쟁영화’ ( 조선일보 1949년12월 29일 자 ) 로대학동기동창이자처남과매부지간 인두사람이이념의차이로갈라져서로에 게총을겨눈다는이야기를담고있었다. 그러나정작영화가관객의흥미를잡아 당긴건 ‘전반에나온 남녀주인공의러부 씬 ( 러브신 ) ’이었다고한다.‘성벽을뚫고’는 ‘종래에못보던기술적인우수성이두드러 지게나타나 ( 중략 ) 선명한화면과대담한 캐머러 ( 카메라 ) 워크그리고편집의묘미와 우수한녹음’으로높은평가를받았고 ‘수 많은 관객이밀어닥쳐호평을 받았다.’ ( 대 한신문1965년6월25일자 ) 이어서해군홍보영화를 준비하던한 감 독은 6·25 전쟁이터지자국방부정훈국촬 영대소속으로들어가우방국에제공할선 전영화를 만들 목적으로 전투 상황을 카 메라로 찍게된다. 난리통에국내에는 필 름을현상할곳이없어일본에서후반작업 을마치고기자시사회를가진‘정의의진격 - 1부’ ( 1951 ) 는일본배급업자들의이목을 끌어배급권이팔린다.기술의중요성에눈 을뜨고있었던한감독은판권료대신16 ㎜ 현상기와 녹음기, 프린트기등 20만달 러어치영화기자재를받아갔다고한다.정 훈국을나온뒤에도한감독은외신특파원 자격으로전황을촬영하며‘정의의진격 - 2 부’ ( 1952 ) 를내놓는다. ‘자유부인’ 등으로 시대변화 담아 본격적인한감독의상업영화행보는두 번째극영화‘운명의손’ ( 1954 ) 부터였다.술 집여성으로위장한북한간첩마가렛이방 첩대대위와 사랑에빠지면서고뇌에빠진 다는,일면후대의‘쉬리’ ( 1999 ) 까지연상케 하는 내용의이영화는이규환 감독의‘춘 향전’ ( 1955 ) 이비슷한 시기에대대적인관 객몰이를하면서5만명가량의관객이드는 데만족해야 했다.그러나 멜로와 활극, 첩 보물이한데결합된 ‘신형식영화’, 한국영 화사상첫장르퓨전이라는점에서도획기 적이었고,남녀간의‘침이꼴깍넘어가는’키 스신을보여주는최초의한국영화라는점 에서대서특필되며화제를모았다. 극 중 마가렛이“저를선생님손으로 보 내주세요”란 말과 함께키스하는이 5초 남짓한장면때문에배우윤인자는이혼직 전으로치닫는부부생활의위기를겪었다. 남편이영화사 사무실까지쳐들어와한바 탕소동을벌인끝에해당촬영은남편의입 회하에,입술에셀로판지를붙이고진행되 었다고 한다. 중년부인들은 키스를어떻 게하는건지궁금해하며문제의장면을보 고자 극장을 찾았고,‘앞으론이것이계기 가되어주연남녀배우들의키스장면이빈 번해질것이기대된다’ ( 한국일보1954년12 월 26일자 ) 는언론기사처럼이후의한국 영화에서는 키스신의출현비중이늘어나 게된다. 소설가정비석의베스트셀러를영화화한 ‘자유부인’ ( 1956 ) 으로한감독은경력의전 성기를맞이한다.전후한국사회에불어닥 친‘계바람’,‘땐스바람’의도시풍속도를그 렸던소설이격렬한 논쟁에휩싸였던것처 럼,영화또한정숙해야할대학 교수의부 인이자유연애에눈을뜨고젊은남성과바 람이난다는내용과애정표현의수위로다 시한번논란에불을댕겼다. 특히주인공오선영과대학생의키스장 면, 한 사장과의포옹 장면이문교부검열 에서문제가되었다.3주간이나개봉이지연 되었고 장면네개를 잘라 내고나서야 상 영허가를 받고 극장에걸수있었다고 한 다. 우여곡절끝에수도극장에걸린 ‘자유 부인’은 10만8,000명의관객을 동원하는 대박을터뜨리며그해한국영화 흥행1위 를기록한다. “무든지최고급품으로 주십 시오,최고급입니까?”라는대사의‘최고급’ 운운은세간의유행어가되었다. 트래킹숏 최초 사용 ‘자유부인’은한국영화에서제대로된트 래킹숏 ( 레일위에카메라가움직이며찍는 장면 ) 과크레인숏을사용한최초의영화이 기도했다.한형모는카메라수리를위해청 계천을드나들다안면을트게된기술자를 제작사 삼성영화사의동업자로 끌어들였 다.필요한이동차와레일이동대,크레인의 도면을그려기술자에게주었는데,미군부 대에서불하받은헬리콥터바퀴를부품으 로조달하는등의노력을기울여일주일만 에촬영보조 도구들을 완성했다고 한다. 덕분에외출하는 장면에서오선영이느끼 는자유로움과해방감을역동적인이동촬 영으로표현해낼수있었다. 뒤처져있었던한국영화기술의한계를 극복하려는노력은 ‘가난한애인들’ ( 1959 ) 을작업할때독일광학회사와제휴해한국 형시네마스코프 ‘북삼 스코프’를 개발하 고,1965년 35㎜필름을가로로자르는이 탈리아식테크노스코프와달리세로로나 누는한국식테크노스코프를개발하는것 까지이어진다. 이후 한 감독은 ‘상업작가로는 제일인 자의위치에 놓일 사람’ ( 경향신문, 1957 년 12월 29일자 ) 으로 우뚝섰다.‘자유부 인’으로 현대극을개척한 그는 ‘청춘 쌍곡 선’ ( 1956 ) 으로한국로맨틱코미디의전형 을 확립했고, 김래성작가의탐정소설을 원작으로 한 ‘마인’ ( 1957 ) 으로 한국 최초 의본격적인스릴러를개척했다.‘워커힐에 서만납시다’ ( 1966 ) ,가수이미자의자전적 인이야기를극화한마지막영화 ‘엘레지의 여왕’ ( 1967 ) 에서는 음악영화에까지도전 하는 등 다방면에서한국영화 장르의저 변을확장하려는시도를쉬지않고이어나 갔다. 1950년대는 한국 근현대사의전환 점이었다.전쟁의피해를복구하는가운데, 자유연애의풍조를비롯한 서구적가치관 과 문물이미국을 통해 들어오면서변화 의물결이일고있었다.그러한시대의흐름 을한감독은민감하게읽고반응했다.‘자 유부인’의여자 교수,‘순애보’의스튜어디 스,‘남성대여성’ ( 1959 ) 의여자의사,‘여사 장’ ( 1959 ) 의출판사사장등도회적인배경 속에서자유분방하고욕망에충실한여성 상을즐겨다루었던그의영화들은한국사 회의모더니티를장르속에반영해나가는 작업이었다. 백화점간판그리며생계잇다가 日서유학하면서촬영기술습득 1949년반공영화‘성벽…’로데뷔 ‘자유부인’개봉하며감독전성기 애정표현수위탓검열논란도 수도극장에10만명관객몰려 “당대최고의상업영화감독”평가 한국영화산업저변확대공헌도 조재휘 영화평론가 플 래 시 백 한 국 영 화 1 0 0 년 17 2020년5월23일토요일 <63> 1950~60년대통속물의대가한형모감독 ‘침이꼴깍넘어가는’키스신으로장안을홀리다 자유부인 (1956) 사랑하는까닭에 (1958) 성벽을뚫고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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