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0년 8월 6일 (목요일) A8 오피니언 DR.도와 MR.오 코리언 아메리칸 아리랑 제2부 -미국 이민 정착기(36) 지천(支泉) 권명오 (수필가·칼럼니스트) 시사만평 원폭 투하 75주년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이메일: ekoreatimes@gmail.com *모든 칼럼은애틀랜타한국일보의 편집 방향과 다를수 있습니다 세상사 가고 오듯 한국사람이 떠나니 또 다른 한국사람이 왔 다. 어느날 가발을 사러 온 손님 (간호사)이 시립병원에 Dr.“도” 라는 한국 의사가 있다고 전화 번호를 가르쳐 줘 만나게 됐다. Dr.도(도상탁)는 가족은 한국에 있고한국에서는남대문병원원 장이었는데미국의학계에서더 많은견문을넓히고또자녀들교 육문제를깊이고심한끝에미국 이민을결정한후이곳시립병원 인턴으로오게된열성적인학구 파다. 일제시일본제국대학의과 를졸업한분이라경험이풍부한 인생선배다. 한국사람이 없는 소도시에서 만났기 때문에 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가족처럼 지냈다. 그분 은 혼자 생활했기 때문에 자주 우리집에서식사를했다. 그러던 어느날 USL(남부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유학생 오한식군이 가발상회를찾아왔다. 오한식군 은고려대학교사학과를졸업하 고USL컴퓨터학과가유명해유 학을 온 학생이다. 그런데 기숙 사와 아파트를 구하지 못한 딱 한처지였다. Dr.도는 훗날 이민 올 가족을 위해 방 3개짜리 아파트를 임대 해 살고 있었다. 나는 Dr.도와 Mr.오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함께 나누며 고국에 대한 향수 를 달래면서 Dr.도에게 Mr.오에 대한딱하고절박한처지를자세 히설명하고거처를의논한결과 감사 하게도 Dr.도가 자기의 아 파트에서생활할수있게흔쾌히 허락해 Mr.오의 거처 문제가 해 결됐다. 머나먼 미국땅에서 우연히 만 난 동포들의 기쁨이 넘치는 뜻 깊은저녁이었다. 그후두사람 은자주우리집에서함께저녁을 나누고주말이면주위에있는명 승고적들을찾아다니면서미국 생활을함께펼쳤다. 일년후Dr.도의가족이이민을 오게됐을때Mr.오는나에게유 학을온동기는공부때문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미국 에정착하기위한것이라고실토 하면서어떻게좋은방법이없느 냐고물었다.그리고자신이선택 한 학과 컴퓨터사이언스는 사학 과를전공했던자신과는너무나 차이가크고적성에맞지도않아 학과를 변경하거나 전학을 해야 겠다고했다. 나는영주권을받을수있는가 장쉬운방법은시민권자나영주 권자와결혼하는것이다. 그러니 일단 한국사람이 많은 LA에 있 는 대학으로 전학을 하는 것이 어떠냐그곳에는한국여성들도 많으니배필을찾기가쉬울것이 라고했다. Mr.오는내의견에따 라 LA에있는대학으로전학수 속을하고학기말이끝나면방학 을이용해 LA로떠날계획을세 웠다. 정든 오한식군이 떠나는 것이싫고붙잡고싶었지만막을 수가 없는 일이다. 떠나기 전 혼 자몸일때미국일주여행을하라 고권했다.그당시그레이하운드 버스회사에서는 미국 일주 특별 세일을실시했는데 50달러짜리 티켓을사면미국어느곳이나다 닐수가있다. Mr.오는 운좋게 그레이하운드 를타고LA를향해미주일주여 행을떠났다. 발언대 손경락 변호사 데이브 그랜런드 작 케이글 USA 본사 특약 히로시마 나가사키 75주년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 었다… 공화당트럼프의 대선연기아이디어질타 지난 7월9일 연방 대법원은 맥 거트 대 오클라호마(McGirt v. Oklahoma) 사건 재판에서 인구 50만의 도시 털사(Tulsa)를 기준 으로 오클라호마주의 동쪽 절반 은지금으로부터200여년전이곳 으로 강제 이주당한 다섯 원주민 부족, 즉 체로키(Cherokee), 머스 코지(Muscogee), 세미놀(Semi- nole), 치카소(Chickasaw), 촉토 (Choctaw)족의 땅으로 봐야한다 고판결했다. 이사건의발단은1997년4살여 아를성폭행해오클라호마주법원 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을 마 친 세미놀족 원주민 짐시 맥거트 (JimcyMcGirt, 71세)가‘현행법상 인디언보호구역에서벌어지는중 범죄는연방법원에서재판하는게 맞지 주 법원은 자신을 재판할 권 한이 없었다’고 재심을 주장하며 시작됐다. 맥거트의이와같은법리주장의 뿌리는까마득한19세기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백인 이주 민들은 미국 남동쪽에 터전을 잡 고 있던 위 다섯 부족 원주민들의 땅을 야금야금 빼앗고 있었는데 1828년 조지아주 북쪽의 작은 산 골 마을 달로네가(Dahlonega)에 서 금광이 발견되자 본격적인 야 욕을드러냈다. 대표적으로 조지아주 당국은 원 주민들에게 금 채굴금지를 비롯 토지 매매금지, 백인상대 불리한 증언금지 등을 강요하는 차별적 법률을통과시키고민병대를시켜 원주민들을쫓아냈다. 촉토같은부족은탄압초기에일 찌감치연방정부와조약을맺고반 자발적으로 이주했으나 체로키족 은 북부에서 온 기독 선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법적 싸움을 전개하 며끈질기게저항한케이스에해당 한다. 그 결과 1831년 체로키족 대 조 지아(Cherokee Nation v. Geor- gia)와이듬해의우스터대조지아 (Worcester v. Georgia) 사건을통 해 당시 대법원장인 존 마샬로부 터‘인디언들의 영토는 미국의 준 독립 보호령에 속하기 때문에 각 주의 법률은 보호령 안에서는 효 력이 없다’는 원고 승 판결을 받 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해 백인들 은 원주민 보호구역 안에 있는 인 디언들을괴롭히지말라는것이었 다. 그러나 변호사에서 군인으로 변 신하여크릭과세미놀족토벌작전 에서의 전공을 통해 1829년 대통 령으로취임한앤드루잭슨은“마 샬이 그런 판결을 내렸다고? 그럼 자기가 그렇게 집행해 보라지!”라 며 대법원의 결정에 개의치 않았 다. 오히려 잭슨은 자신의 주도하에 미연방의회가1830년에통과시킨 ‘인디언 이주법’을 내세워 위 다 섯 부족 원주민들을 현재의 오클 로호마주로강제이주시켰던것이 다. 이때 원주민들이 여름의 각종 전염병과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 에시달리며9개주를거쳐걸었던 2,200마일의루트는1987년미의 회에 의해‘눈물의 길 역사의 길’ 로지정되었다. 이랬던 아메리칸 원주민 수난의 역사가맥거트사건을계기로새로 운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문자주의 자 법률가 고서치 대법관은 진보 성향의다른대법관 4명과의견을 함께하며 다수 판결문을 작성했 다. 그는“눈물의 길 건너편엔 약속 이 있었다”고 운을 뗀 후, 미 의회 가 1830년대 초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며 원주민 대표와 맺은 조약에서“미시시피강 서쪽에 지 정된 보호구역의 땅은 영원토록 원주민들의 것”임을 인정해주었 기 때문에 이 땅의 사법관할권은 아직원주민들에게있다고판결했 다. 반면 로버츠 대법원장은 반대의 견을통해법원의결정이오클라호 마 형사사법 시스템에 큰 혼란을 가져올것이라고경고했다. 이번판결은재심청구에따라형 사사법권에국한된것이지만연방 정부와 원주민 부족들 간에 맺은 조약이 아직 유효함을 대법원이 인정한것이기때문에이를근거로 향후 오클라호마주의 유전수익과 세금, 치안문제등많은분야에후 폭풍이몰아칠것으로전망된다. 가까운예로이번판결의주인공 짐시맥거트처럼주법원에서유죄 판결을 받은 원주민 상당수는 당 장 다시 재판을 해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눈물의 길’ 새로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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