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0년 10월 1일 (목요일) D4 기획 2020년9월21일월요일 1990년10월 3일은수요일이었다.그 날저녁베를린중심지옛제국의회의사 당앞에서동서독의통일을축하하는기 념식이열렸다. 바이체커독일대통령은 통일을 1선포했다. “자유로운 자결권 에기초해우리는독일의자유와통일을 완성합니다. 우리는 유럽통합을 통해 세계평화에기여하고자합니다.그과제 를이행하면서우리는신과인류앞에서 책임을통감합니다.” 종소리가 퍼지고, 베토벤이울렸다. 폭죽이올랐고 감동이일었다. 세계전 역에생중계되었다.한시대의종언과새 시대의개막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넘쳤다. 특히한반도 남단의주민들은 얼굴의모든곳이움찔거렸다.“우리또 한그러하리라!”“우리도그들처럼!” 30년전그날의사진과영상을 다시 보면행사장연단의정중앙에한여성이 보인다.야당지도자 라퐁텐과빌리브 란트와외무장관겐셔, 콜 총리와 바이 체커대통령사이에유일한여성하넬로 레콜이미소를띠고있다. 콜의부인하넬로레에게도그순간은 벅찼다. 그가 “가정을지키고아이들을 돌봐” 남편이통일정치에전념할수있 도록했다는식의얘기는억지미담에불 과하다.하넬로레는이기적인남편을만 나힘들었다. 바쁜남편을마냥기다렸 고, 남편을겨냥한정치공격이때로자 신에게인신비방으로쏟아지는것을감 당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넬로레는 “그 어려운시기”에“산처럼자신을지켜준” 남자를 만난 것에 고마워했다. 둘은 1948년서독 라인강 자락 루트비히스 하펜의학교축제에서만나12년의연애 끝에1960년결혼했다. 첫만남당시콜은 18살, 하넬로레는 15살이었다. 하넬로레가 “어려운시기” 라고 말했던이유는 강간 피해와 척추 부상 때문이었다. 1945년전쟁이끝날 무렵하넬로레는동독지역인라이프치 히근교에서어머니와함께소련군여러 명에의해윤간을당했다.심지어소련군 들은성폭력뒤에모녀를창밖으로 “시 멘트부대자락처럼”내던져버렸다. 당시12살이었던하넬로레는정신적 상처도심했지만척추를심하게다쳐평 생고생했다.하넬로레는1960년대부터 페니실린알레 르 기로고통을 받았 다.척 추치 료 제가 낳 은 부 작용 이었다. 1993 년의사의 약 처방 오 류로다시 햇빛 알 레 르 기 증 상이심해져격심한통 증 을 겪 으 며밤 에만 잠 시움 직 이는생 활 을지 속 했다.그는2001년 7 월4일 밤 11시 경약 물복용 을통한자살로 삶 의고통을끝 냈 다.한때산처럼든든했던남편콜은 곁 에 없 었다. 그는 베를린에서다 른 일 로여전히바 빴 다. 1990년독일통일은1949년독일 분 단 의 극복 이기도 했지만 1933년 등 장한 나치 즘 과거사의 극복 이기도 했다. 그 것은또한 1945년종전을전 후 한혼란 과 무책임, 서로 다 른 방 향 에서 오 가는 폭력과추방에게도종지부를 찍 는의미 가있었다.독일통일을 위 한평화 협 상은 남성정치가들의 작품 이었다. 독일통일을선포하고자축하는중 노 년남성정치가들의무리에서하넬로레 는 남다 른 감회를 가 졌 다. 통일총리의 부인으로서만이아니라 1945년성폭력 의 희 생자로서그는통일독일에서는이 제 더 이상 ‘ 자유 ’ 와 ‘ 자결권 ’ 과 ‘ 평화 ’ 가 유린되는일이 없 기를빌었다.전쟁이나 물 리적 충 돌이 없 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 고 폭력과 적대가 예 방되고 상 호 신 뢰 와 존 중이 필 요했다.독일통일은여러 차원 에서그 런 결과를 낳 지 못 했다. 사 회소수자의관 점 을가지면독일통일에 대한 찬 가를 따 라부를수 없 었다. 동독주민의관 점 에서 흡 수통일을비 판 하는 것 못 지 않 게중요한 것은인종 적소수자의관 점 에서 배 제와폭력의새 로운 위협 을 밝 히는일이다. 사실이주 제는 백 인남성중심의독일사학계는 물 론 이고 국제역사학계에서도아 직충분 히다루지 못 했다. 기실통일독일 직후 가장 급박 하고심 각 했던정치이 슈 는동서독의 차 이나동 독인들의소외문제가아니라외국인에 대한적대행 위 와폭력가해 였 다.정치가 들과언 론 인들은 그 문제를 다시통일 후 의일시적일 탈 이나소수에의한주 변 적일화 쯤 으로 다 룬 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의피해와 희 생에대한 망각 과무시 의 형 식일 뿐 이다. 1991년여 름 독일은 외국인을 노 린 적대행 위 와 폭력사 건 이 빈발 했다. 특 히1991년9월1 7 일부터23일사이에동 독 지역 작센 주의 호 이에 르 스베 르 다 ( Hoyerswerda ) 의폭력은그나마유지 되던 안 전의 경 계를무 너뜨 렸다. 폴 란 드 국 경 에가 까 운 호 이에 르 스베 르 다에서 네 오 나치들은외국인계 약노 동자들과동 유럽난민들의 숙 소에불을지 르 고 위협 하 며 돌을던 졌 다.폭력은특 별 한 원 인이 없 어도 혐오 를 숙 주로해서순식간에 경 계를넘어 증 폭 됨 을알려준사 건 이었다. 9월 1 7 일 8명 안팎 의 네오 나치들이 호 이에 르 스베 르 다의시장에서베트남 출 신상인들을 골 리고 때렸다. 베트남 인들은 난민 숙 소로 몸 을 숨길 수밖에 없 었다. 네오 나치들은 숫 자가 늘 어 났 고그 숙 소로 몰 려가난동을부렸다. 숙 소에는 160명남 짓 의베트남과 모 잠 비 크출 신계 약노 동자들이거주했다. 그들은 통일전 동독 국영회사와 계 약 을 맺 어동독으로 ‘ 합 법 적으로 ’ 이주 했고 애초 계 약 기간은 아 직몇 달 이나 남 았 다. 다만동독국가는무 너졌 고회 사는사라 졌 기에그들의계 약 서가 휴 지 가되었다. 그 렇더 라도 그들이당장 쫓 겨나기는커 녕 폭력의대상이 될 이유는 전 혀없 었다. 충 격적인것은 조직 화 된네오 나치들 만이아니라인근주민들의지지와 경찰 의방관이었다. 그들또한“외국인은 꺼 져라”는 네오 나치의구 호 에 호응 했다. 대 략 500명의인근주민들이 네오 나치 의폭력과 구 호 에 박 수를 치 며환호 했 다. 동독공산주의에 항 의하 며‘ 자유 ’ 를 찾 고 분 단을 뚫 고자 통일을 원 했던그 들이었다. 아울러 경찰 은피해자들을보 호 하지 못 했다.아니보 호 하지 않았 다. 사실 경 찰 에겐 그 계 약노 동자들을 본 국으로 돌려보내는일이 더 중요해보 였 다. 사 건직후 대부 분 의외국인 노 동자와 난 민들은 본 국으로 쫓 겨 났 다. 당시무책 임한우 파 정치가들과선정적인보수언 론 은외국인 노 동자들의폭력피해에대 해 걱 정하고대책을요 청 하기보다독일 시민들의외국인에대한불 안 을이해한 다고말했으 며노골 적으로외국인 노 동 자들과난민에대한공포를 조 장하기도 했다.특히 집 권여당기민련정치가들은 난민 수 용 에대한 반대를 노골 적으로 주장하면서난민과외국인 노 동자들에 대한 테 러를방관했다. 1992년한 해동독의 북쪽 인 메클렌 부 르크 - 폼메른 주만 보 더 라도 외국인 을겨냥한 극 우 테 러사 건 이20 7번 이 발 생했다. 그들은 길 거리에서외국인에게 물 리적공격을 가하는 것외에도 동독 정부와계 약 을통해 건너온 외국인 노 동 자들의 숙 소에 50에서200명 씩몰 려와 방화와 투석 을일 삼았 다. 통일전동독이라면상상하기어려 웠 던일들이상당기간동독지역곳곳의일 상세계의한 부 분 이되었다. 물론 , 동독 지역에서도그와 같 은나치의폭력과일 부주민들의외국인 혐오 에 맞 서대중시 위 와 조직활 동이새 롭 게 발 전하기도했 다. 하지만 한 번 고 삐 가 풀 린이주민과 난민 혐오 를 잠재 우기는 쉽 지 않았 다. 통일 후 서독지역의외국인 혐오 나난 민에대한 폭력은 동독 지역과는 달 리 빈번 하거나 노골 적이지 않았 다. 하지만 통일 후 서독의일부지역에서도 네오 나 치들은난민 숙 소에대해 물 리적 테 러를 감행했다. 경찰 들이수수방관하는일도 적지 않았 다.베를린,심지어서베를린에 서도 유사한일이 발 생했다. 네오 나치 들이서베를린에서“외국인 꺼 져”,“터키 놈 들 꺼 져” 구 호 를외쳐대 며 공포를 조 장했다. 이주의가 족 사 배경 을지 닌 외국계독 일인들은 순식간에 배타 적인민 족 주의 감정의 물 결에 위 기와불 안 을 겪 었다.정 치와언 론 이그문제를 별 일아 닌 것으로 다루었고,심지어비 판 세력이나 좌파 들 도 둔 감했다.이주민 출 신독일인들은스 스로자기보 호 와연대를 조직 하기시 작 했다.독일통일은공동체주민모 두 에게 자유와평화를제공하지 못 했다.새로운 갈등 과 균 열, 위 기의시 작 이었다. 동서독의 ‘ 통합 ’ 은 기 본 적으로 주류 다수 사회 ( 서독 ) 와 소수자 집 단 ( ‘ 동독 인 ’ ) 의관계문제로보는것이 더 적 절 하 다고말했다.문제를그 렇 게보면,또다 른 소수자 집 단,이를 테 면인종과 문화 가 다 른 이주민과 난민 출 신사회구성 원 들의통일 경험 은 더욱 특 별 한의미를 지 닌 다.그들에게통일은 느닷없 는계 약 해지 였 고 갑작 스 런 돌 팔매질 이었다. 양 복입 은중 노 년남성들이 ‘ 통일 ’ 과 ‘번 영 ’ 을 말할 때어 딘 가에는 폭력과 배 제의 기억과 경험 을지 닌 사회소수자들이뒤 돌아서있다. 1990년 10월 3일에도 ‘ 1945년의폭 력피해자 ’ 하넬로레는총리부인으로서 잠 시미소를띠 며 남성으로구성 된 평화 정치가들 옆 에서모 두 에게 안 전과 복 리 의기회가열리기를기대했다.하지만 현 실은 새로운 폭력과 증오 가 사회의일 부에서 발 생하는것을 막지 못 했다. 통 일 30주년을 맞 는독일, 멋 진기념과 뿌 듯 한 회고 속 에서소수자의 삶 은 잊 히 고있다. 평화는통일의 환희 뒤에 따 라 온 증오 의 고성과 돌 팔 매질 을 기억하는 일이 기도 하다. 더 나은 통 일의 길 은 거기서 시 작 한다. 이동기강원대평화학과교수 “통일만세”뒤이방인으로, “외국인꺼져”돌팔매직면하다 한반도평화 <11>통일과소수자 1990년10월 3일베를린중심지옛제국의회의사당에서치러진독일통일축하기념식. 동방정책으로 유명한빌리브란트(왼쪽부터)와한스디트리히겐셔, 하넬로레콜과헬무트콜총리부부,바이체커대통 령이연단에서시민들환호에화답하고있다. 네오나치“이주민^난민가라” 주민은지지하고경찰도방관 서독지역까지테러발생 어릴적‘전쟁성폭력’피해당한 콜총리부인하넬로레의꿈과달리 새로운폭력^증오^갈등시작돼 1989년5월동독의켐니츠지역에서실시된지방의회투표에베트남인으로추정되는외국인계약직노 동자가참여하고있다.당시동독지역엔베트남,쿠바등지에서온외국인노동자들이많이거주했다. 독일연방기록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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