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1년 2월 27일 (토요일) D8 기획 1883년고종이일본과맺은제물포조약에따라개항한인천항.서양문물유입통로가되면서 인천은개화의선구자역할을했다.우리나라의근대화와산업화, 국제무역에도기여했다.이런 배경덕에인천에서가장오래됐을법한가게로수인곡물시장통의어느점포나차이나타운한 길모퉁이의중식당을떠올리기쉽지만,인천 ‘최고 ( 剑〢 ) 가게’ 기록은치과의원이갖고있다. 인천시동구송림동주택가대로변에자리잡은중앙치과.인천에서1970년이전창업해현재까지 운영중인69개점포중하나로,일제강점중이던1934년개원했다. 중앙치과의원은경인선철길이지나는동구송림동배다리삼거리인근,지금은흔적을찾아볼수 없는문화극장건너편에서처음문을열었다.드라마 ‘도깨비’와영화 ‘극한직업’ 배경으로등장한 배다리헌책방거리에서멀지않은곳이다. 1. 지난18일오후인천동구송림동 중앙치과의원에서이창수원장이진료를 하고있다. 2. 중앙치과의원3대원장인이창수원장은 병원을놀이터삼아뛰어다니고아버지를 도와환자를돌보아자연스럽게치과 의사의길을걸었다. 3. 인천에서1970년이전창업해현재까지 운영중인69개점포중하나로,일제강점 중이던1934년개원했다. 4. 중앙치과의원에들어서면한벽면에1~3대 원장사진이걸려있다. 1 2 3 4 <53>인천동구중앙치과 since1934 핆 剑〢 ‘ 많멚 ’ 중앙치과는 서울 출신의고 ( 故 ) 이시 찬초대원장이서울대의과대학의뿌리 인경성제국대학의학부를졸업한뒤인 천으로와서개원했다.인천도시역사관 은 “이초대원장이이미작고했기에정 확한개원연도는알수없으나,대략대 학을 졸업한 1934년으로 개원 시기를 추정한다”고말했다. 이초대원장은 내과의자격도 있어 ‘중앙의원’이라는이름으로치과와내과 진료를함께봤다.지난 18일만난중앙 치과의원 3대원장인이창수 ( 58 ) 원장 은 “치과의와 내과의자격이모두있는 의사가 요즘도 드물지만 당시에는 더 드물었다”며“치과의원이드물던때라 진료를받기위해먼지방에서도손님들 이왔다고한다”고말했다. 인천시의사회회장을지낸이초대원 장은형편이넉넉하지않은사람에게는 무료진료를해주기도했다. 그래서중 앙의원은 가난한 사람부터이름 있는 정치인까지늘 환자로 붐볐다. 일본인 환자도 많았다. 이현원장은 “다른 의 사는왕진을갈수있지만치과는장비 가있어야하기때문에진료를받기위해 선환자가반드시병원으로와야했다” 며“환자중에일본인이많았는데, 그런 조부님의인맥을이용해일본쪽에연을 이으려는사람들도병원을많이찾았다 고한다”고말했다. 초대원장은수동식재봉틀처럼발로 발판을 밟아 돌리는치과용 드릴 ( 핸드 피스 ) 을사용해진료를봤다.당시핸드 피스는절삭력이많이떨어져치료하는 데더많은 시간이걸렸다. 환자들에게 는 공포의대상일수밖에없었다. 치과 진료용 의자 ( 유니트체어 ) 도 지금과 달 리조명등,머리·팔받침대가없는단출 한모습이었다.이원장은“아쉽게도조 부께서쓰시던핸드피스, 유니트체어를 비롯해초기중앙의원의흔적은병원이 두차례이전하면서버리거나분실해현 재남아있는게없다”고말했다.그가아 직간직하고있는것은 초대원장의흑 백사진과병원이름이전부다. 2 샎폲졂컪 “ 폏읺쫂삶쫗칺 ” 초대원장이예순이던1968년세상을 떠나면서장남이병원을이어받았다.고 ( 故 ) 이익원2대원장이다.서울에서태어 났지만인천에서자란 2대원장은치과 의사이면서공무원이었다.그는대학졸 업뒤개업의가아닌다른길을택했다. 강원평창, 대전유성등지에서보건소 장으로 근무했다. 초대원장이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손자가 못마땅해아들 에게한소리했다고 한 것도이때문이 다.이원장이태어난곳은평창,유년시 절을보낸곳은유성이다. 이원장은 “다섯살 때조부님이돌아 가셨는데, 병원에서떠들고뛰어다니면 서놀다가혼이난기억밖에없다”며“조 부님은 엄하셨는데, 선친은 주변에서 ‘그렇게좋은분이없다’고할만큼자상 한분이셨다”고기억했다. 병원을물려받기위해보건소장을그 만둔 2대원장은병원에서환자들을진 료하면서도 틈 이나면전남 목 포로 내 려가 곤 했다.대한적 십 자사병원선을 타 기위해서 였 다.한 번 내려가면 열흘 에서 보름 정도 병원선을 타 고 서해와 남해 이 섬저섬 을 다니면서 낙 도 주 민 들을 치료해 줬 다고 한다. 섬 에서그를 찾아 뭍 으로나 오 는환자도있었다. 이원장은 “병원선일은 봉사 활 동이 어서수익면에서는병원을 운영 하는게 훨씬 나았을것”이라며“개업의가아닌 보건소장을 택하신것을 볼 때도 영 리 보단봉사에관 심 이있으셨던것 같 다” 고말했다. 쪟풞컪쒾뽎섦팒핂 ,3 샎풞핳 2대원장은 19 7 2년병원을 송림오 거 리지금의자리로이전했다. 196 0 년문 을연현대시장건 너 편이었다.이일대는 당시인천 최 대 번화 가인인천중 구 신 포동주변만큼이나유동인 구 와거주 민 이많았다.19 70~ 8 0 년대중앙치과의원 은 여 전 히 많은 환자들이찾았다.인천 영종 과강 화 , 백 령 등 섬뿐 만아니라 김 포등경기도에서도왔다. 병원건물 2 층 은 가 족 의살 림집 이었 다.이사실을아는경 찰 과 응급 환자들 은 수시로 병원문을 두드리고전 화 를 걸었다. 교통 사고나 폭행 사건으로 치 아가 빠 지거나 부 러 지고 얼굴 을 다친 환자들이 밤낮 없이병원을찾았다. 밤 이나 새벽 간 호 사가없을때는 당시학 생 신분이었던이원장이간 호 사 역할 을했다. 병원을놀이터 삼 아뛰어다니고아버 지를도와환자를돌보던이원장은자 연스 럽 게치과 의사의길을 걸었다. 그 는 “강한 의지로 치과의를 선택했다기 보단 당연 히 해야 한다는 생각 이강했 다”고 말했다. 글 쓰기를 즐 기고 낚 시 동 호 회회장을 맡 을 정도로 낚 시 광 인 그는“아침부터 저녁 까지병원을지 키 던 선친을보면서의사보다는 활 동적인기 자나방 송 일을하면어떨까하는 생각 에한 눈 팔기도했다”며“하지만고 교 진 학 때이과를 택하면서 망설임 을 버렸 다”고말했다. 이원장은대학을졸업한 199 7 년부터 아버지 밑 에서일했으나아버지건강이 나 빠 환자진료는주로그의 몫 이었다. 2 000 년아버지가돌아가시면서병원을 이어받았다. 주위에서병원을 넓히 고직 원수도늘리라는조 언 을많이받았다. 그 러 나 그는 병원 홍 보나 환자 유치를 위한 사무장, 상 담 실장 ( 코디네 이터 ) 등 비진료직원은 따 로두지않았다. 그는 “전 통 적인치과 모 델 을 유지하 면서어 느 순간 도태 된 다는 느낌 이 든 것이사실”이라며 “ 영 리를 안 따질 순 없지만 조부, 선친에게서 배운 것이있 어 앞 으로도 크 게 바꿀생각 은없다”고 말했다. 100 뼒많멚쇮힎쁢짆힎쿦 19 70 년대1 7 만명에이 르 던인천동 구 인 구 가 199 0 년대들어 1 0 만명아래로 떨어지고곳곳에 크 고작은치과가들어 서면서중앙치과의원은 큰타 격을받았 다.기업형 네 트 워크 치과라는 큰 경 쟁 자 도나 타 났다. 주변에서는신도시로이전하라고 권 유했다.치과일대가도시환경정비사업 구 역으로지정 돼 어 쩔 수없이이주해야 할상 황 에 놓 이기도했다. 그 러 다 2 0 18 년정비 구 역지정이1 0 년만에해제 되 면 서병원이전은 없던일이 됐 지만 언 제 또 개발 바 람이 불 어이전을강요받을지 알수없다.이원장은“5 0 년 넘 게한자 리를 지 켰 지만, 보상금은 7 , 000 만원이 전부 였 다”며“다 행 인지 불행 인지재개 발사업이무 산됐 다”고말했다. 8 7 년을이어 온 중앙치과의원이4대로 이어져‘백년가게’가 될 수있을까.이원 장은 답 을유보했다.두아들중한명이 라도병원을이어 갔 으면하는마 음 반, 아들들이원하는길을 가길 바 라는 마 음 이반인 탓 이다.“치과의사일이 힘 들 고,재미를찾기어려 운 직업이어서 권 하 기도 그렇고, 그렇지만 오랜 시간 꾸준 히 병원을 찾아주시는 환자 분들을 생 각 하면그 냥 가만있을수도없어요.시 간이있으니 좀 더기다려보려고요.” 글^사진이환직기자 故이시찬초대원장 1934년개원 가난한사람부터정치인까지북적 병원이어받은장남,영리보단봉사 틈만나면병원선타고섬주민진료 병원서뛰놀던아이가 3代원장에 구도심인구감소등으로힘들어 “아들이4대이어갈지는글쎄요” 90년가까이‘아픈이’돌봐온 3代$인천最古가게는치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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