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2년 6월 28일 (화요일) 오피니언 A8 애틀랜타칼럼 이용희 (목사) *모든 칼럼은애틀랜타한국일보의편집 방향과다를수있습니다 내 마음의시 삶과 생각 이병용 화백을 그리워하며 경남 하동 출신인 고 이병용 (1948~2001) 화백의 21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업적을 돌아본 다. 1970년대 초 한국화단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아방가르드 그룹‘에스프리(Esprit)’의 창 립 멤버였고 리더였으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한국 미술계의 선구자였다.‘ F-77’이란 서양화 비구상 작 품으로 국전(대한민국미술대 전)에도입선한장래가밝은미 술가였다. 그렇게 명성을 얻어가던 그가 30대에 뉴욕 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세계미술의 메카 뉴욕에 서 인정받아야한다는 생각 때 문이었다. 뉴욕시절의 이병용 화백은 가난한 한국 화가들의 보호자였다. 40대가되어하와이본토인‘ 힐로’(Hillo, 빅아일랜드)로 이 주한 것은 소아과 의사인 아내 를따라서였다. 그가하와이한인회장으로있 던 2000년, 필자를 그곳으로 초대하여방문한일이있었다. 처음으로 안내한 곳은 이민 선조들이 묻혀있는 힐로의 알 라이공동묘지였다. 당시내눈 으로직접보았던알라이공동 묘지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로처참했다. 알라이공동묘지는네모난구 역을 절반으로 나누어 좌측은 일본묘역, 우측은 한국묘역으 로 되어있었는데 일본묘역은 봉분도 온전히 살아있고, 묘비 며 잔디도 잘 손질되어 보기에 좋았지만한국묘역은오랫동안 방치하고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어비석은제멋대로쓰러지거 나 절반쯤 파묻혀있었고, 봉분 은 흔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 로무너져내려있었으며잔디를 깎지 않아 잡초만이 무성한 폐 허처럼변해있었다. 선명히눈에띄는것은좌측은 일본인 묘역이고, 우측은 한국 인 묘역이라고 써놓은 경계석 뿐이었다.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 운 눈물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지금 우리의 조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되었다. 이민 선조, 그들의 애국심, 희 생이밑거름이되지않았던가? 이역만리타국땅에서땅콩농 장의 노동자로 노예처럼 살아 가면서도 일제에 맞서 독립운 동을 하라며 이승만에게, 만주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거두 어보냈던분들이다. 우리 후손들이 어찌 그들의 나라사랑을 잊을 수 있단 말인 가? 그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자녀들이 대부분 본토로 이주 해버려 그들이 묻힌 알라이 공 동묘지는 돌보는 이가 없어 당 시내가바라본풍경그대로폐 허나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일본사람 묘역과 같은 곳에 있어야했을 까? 이 처참한 현실을 본 이병용 한인회장이‘묘역단장사업’을 결심했다. 그는 힘도 능력도 없 었지만옳은일이고, 후손들가 운데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는 열정하나로‘알라이 이민선조공동묘역재단장사업 ’이라는 100만달러가 필요한 사업계획서 한장을 들고 도움 받을만한 기관이나 단체들을 찾아나섰던것이다. 국가보훈처를찾아가서그들 을 감동시켰고, 대리석 위령탑 제작을 위해서는 홍익대학 은 사인 박서보 화백(당시 한국미 술가협회장)에게 부탁드렸으 며, 엄청난 무게의 위령탑을 운 반하기위해서는대한항공에협 조를구했다. 그외에도많은뜻있는교민들 의 정성어린 성금과 도움으로 지금의 빛나는 위령탑을 세웠 고, 묘비를새로제작해서제자 리에놓았으며, 봉분을새로만 들었고, 잔디를 입혀서 새색시 가 신부화장한 것처럼 단장을 했다. 일본묘역과 한국묘역의 위상 이 달라졌다. 쉽지 않은 일이었 다. 이병용화백은 한인사회를 위 해큰일을한어른이었다. 20여 년이지난일이지만이민100주 년이 넘었다. 그동안 또 어떻게 변했는지궁금하다. 이병용 화백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을 사랑했던 선 조들의 묘역을 돌보는 일, 잊어 서는안되겠다. 제이슨최 수필가 성인아동의극복 고대 에스키모족에게 전해 내려 오는우리에게잘알려진이야기하 나가있습니다. 옛날에스키모족들 에게도한국의고려장과비슷한관 습이있었던가봅니다. 어느날한아버지가사랑하는아 들과함께자기아버지곧꼬마에게 는할아버지를버리려고했습니다. 일종의고려장을지내기위해서그 들은썰매를타고북극의얼음바다 계곡 아주 깊은 곳으로 갔습니다. 인적이미칠수없는곳까지이르렀 을 때 이 아버지와 아들은 노인에 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썰 매에 노인을 그대로 놓아둔 채 아 버지는자신의썰매를타고집으로 돌아가려고했습니다. 그런데갑자 기 아들이“아빠. 잠깐만”하고 할 아버지가있는곳으로다시썰매를 타고돌아가더랍니다. 그러더니썰 매에묶인할아버지를풀고는썰매 를가지고왔습니다.그래서아버지 가“야. 너왜썰매를가지고오니” 라고묻자그아들은이다음에제 가 아버지를 여기로 데리고 올 때 이썰매가또필요하잖아요라고당 연하다는듯이대답을했다는것입 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 아버지 는충격을받고잠시거기서생각에 잠겼다가자신의잘못을뉘우치고 는 노부를 다시 모시고 집으로 돌 아왔다는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시인인 윌리암 워즈워드 가한말가운데“모든아이는어른 들의 아버지다”라는 애기가 있습 니다. 이말은몇가지중요한교훈 을우리에게전달해줍니다.첫째는 아버지가살아왔던삶의스타일은 자녀들에게그대로반복된다는사 실입니다.그런의미에서모든가정 의자녀들은부모의거울이다라고 말할수있습니다. 그러나이말이 의미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뜻은 어린시절에우리가경험했던모든 영향력은어른이되더라도쉽게떠 나지않는다는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 고어머니가되어도어렸을때우리 들이받았던영향력은그대로우리 안에 내적으로 잠재해 있다는 것 입니다.즉유년기를지배했던형상 이평생의삶의스타일과의식구조 를결정하고지배한다는사실입니 다.바로이러한영향력을가리켜서 최근의심리학자들은우리들안에 존재하고있는과거의어린아이라 고정의했습니다. 유명한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정 신의학자이며교수로있던휴미슬 다인 박사가 이 말을 맨 처음으로 사용한분이었습니다. 소위내재된 과거와아직도존재하고있는나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 이것을 어떤 심리학자들은숨겨진아이라고부 릅니다.흔히들보편적으로사용하 는술어인성인아동이라는의미입 니다.저는창조적이고행복한가정 을 만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 가있다면그것은바로‘성인아동 의극복”이라고생각합니다. 즉어 떻게 어린 시절의 영향을 극복 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입니다. 물론 어린 시절의 영 향력이 다 나쁘고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거기에는상당히좋은영 향력도존재하고있습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우리가 받았던 매우 부정적인영향력이한평생우리를 불행하고고통스럽게만든다는사 실을부인하기어려울것입니다.이 것을극복하는정도만큼우리는성 숙할수가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이 이러한 사 실을지적하기훨씬오래전부터성 경의 한 저자인 바울 사도는 이러 한유명한말을했습니다.“내가어 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 이와같고장성한사람이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이것은자기안에있는성인아동 의 모습을 극복한 성숙의 고백으 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 면성인아동을극복하는것이우리 에게중요한과제일까요? 그것은몇가지로정리할수있습 니다. (다음호에계속) 추억 목마른울음으로 거기그렇게 끝에서서나를보오 그윽한눈빛으로 사랑하노라하고 꿈을함께하자 하며 소중한언어들을 기억하던 뜨락에서서나를보오 너는참 착하고예쁘다고 만져보고갖고싶었던 옛적그대로 그렇게나를보오 물든황혼의 고운빛으로채색하여 보듬어포옹하듯나를보오. 유당박홍자 -시인 -원주여자고등학교졸업 중앙대학교법학과졸업 -2000년도미,해외문학신인상수상 -시집〈거기그렇게〉〈손끝에닿을 그리움그하나로〉출간 -서간집<시간의태엽>출간 -미주한인재단애틀랜타지회장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애틀랜타회장역임 -애틀랜타문학회전회장 재미시인협회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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