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4년 4월 6일 (토요일) D10 기획 2024년4월6일토요일 핊 잖몶줆멆펂핮믆엲묻 신의손은 소련붕괴후 우연한 기회 에한국에왔다. “스페인바르셀로나, 이스라엘등여러곳에서콜이왔는데, 당시에이전트가 내게한국에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흥미롭다 생각 해도전하게됐다”는게그의설명이다. 그에게손을내민건박종환당시일 화천마 ( 현성남FC ) 감독이다.일화천마 는직전시즌6개구단가운데최고득점 ( 56골 ) 을올리며강한공격력을보여줬 지만,수비불안으로최다실점 ( 63골 ) 을 기록해전체5위에그치는황당한결과 를냈다.팀의골문을단단히걸어잠가 줄유능한골키퍼가간절했다. 신의손은 박 감독의 열망을 채워 줄적임자였다. 그는 당시소련 1부리 그 상위팀인토르페도 모스크바의주 전골키퍼이자 주장으로 활약한 명수 문장이었다. 각종우승컵도숱하게들 어올렸다. 뿐만아니라소련프로리그 통산 170경기에출장해 101경기를 무 실점으로 끝내 소련리그 사상 8번째 로 ‘야신클럽’에등록됐다.야신클럽은 100경기이상 무실점을기록한 골키퍼 만등록할수있는명예의전당이다. 0 헞샎킲헞윮 · 줂 엳픊옪푾킇많솒 신의손은입단첫해출전한 30경기 ( K 리그기준 ) 에서단21골만을허용하며실 점률0.7을기록했다.일화천마에서활동 한4년통산실점률도0.8에그친다. 세시즌연속무교체로출장해136경 기를 내리뛰는기염을 토하기도했다. 당시프로축구사상최다기록이다.이 마저도 더할 수있었는데옐로카드 2 장누적으로어쩔수없이한경기를거 르며신기록행진에마침표를찍었다. 덕분에일화천마는 창단 4년 만인 1993년부터1995년까지 3년연속 우 승트로피를거머쥐었다.신의손은“한 국서첫경기후기자가내게목표를묻 기에‘첫해2위,다음해우승’이라고자 신있게말했더니고개를갸웃하더라” 며“내가 ‘일단봅시다’ 했는데정말내 말대로다됐다”고말했다. “ 젆읺 앋삲펔펂힖헣솒 ” 헏픟펞펂엲풎 하지만 그의한국 생활이쉽지만은 않았다. 신의손은 “한국말은 물론, 한 국축구에대해서도아는게하나도없 었다”며“막상한국에와보니축구스 타일까지달라서스트레스를정말 많 이받았다”고 털어놨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받아 1년 만에머리카락이 다없어졌을정도”였단다. 특히 훈련스타일에서 괴리를 많이 느 꼈 다. 그는 “훈련이많아도 너무 많 았다”며“훈련하고 파 이 팅 한번하고, 또 훈련하는 게 반복돼 정말 힘 들었 다”고 말했다.이어“시 합 때 도 내가 한국말을 못 하니 수비와 소통이안 돼 실수 가많아졌다”며“여러모로 적 응 이 참 쉽지않았다”고 덧붙 였다. 다행히 박 감 독을비 롯 한 팀 선 수들과 코칭 스 태 프, 구단 의지 원 속에신 의손은 1년 만 에 적 응 을 마 쳤 다. 신의손 은 “나에게팀 분위기는정 말 중요 한 데, 그 때 분 위기가 좋 았다. 모 두 가나를지 원 해주 고도와 줘 서 빠 르게적 응 할수있었다” 며“첫해에리그 2위를하고,컵우승에 이어 MVP 까지받으니자신감이생 겨 더열 심 히하게됐다”고말했다. 삲킪 팒폶퓒믾 , 믆읺몮믾 순탄 하게 흘 러가는 듯 했 던 한국생활은1999년 두 번째 위기를 맞 았다. ‘신의손 효 과’에 자 극 을 받은 프로 구단들이너도나도 외 국인 골키퍼를 영 입하 면 서1995년에는 8팀 중 6팀이 외 국인 골 키퍼를 기용하는 상황에 이르 렀 다. 그러자 프로축구 연 맹 은 국내골키퍼 육 성을 명목으로 1996년부터점진적으로 외 국인골키퍼 출장기회를제한했고, 1999년 엔 아예 금 지시 켰 다. 매 해26 ~ 30경기를뛰 던 신 의손도 1997 ~ 98년에는 각각 9경기, 5 경기 밖 에뛰지 못 했다.그는“경기에출 전을 못 하니무 엇 을위한건지모를훈 련만 계 속했다”며“ 앞 으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 라막막하고 힘 들었다”고 당시를 돌 아 봤 다. 그 럼 에도 희 망을 놓 지않았다. 괴로 웠 지만 술 , 담배 등 몸 에해로운 건일 절하지않았다. 대신축구만생각하며 최상의 컨디션 을 유지하는 데 집중 했 다.그 때 보 란듯 이기회가 찾 아왔다.이 번 엔 안 양LG조광래 감독이손을내 밀 었다. 단, 조 건이있었다. 다시축구를 하 려면 러시아 국적을 버 리고 한국인 으로 귀 화해야했다. ‘ 묺읺킮 ’ 틶 1 샎킪혾쇪킮픦콞 귀 화 결정은 생각보다 어 렵 지않았 다. 신의손은 “당시내 겐 축구 생각뿐 이었다”며“축구를 할 수있다 면뭐든 할수있었다.기회는내게 큰 동기였고, ‘나이가많아도 힘 이있으니 괜찮 다,할 수있다’고스스로 되뇌 며도전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지 낸 8년여의시간도적 잖 은 영향 을 미 쳤 다. 그는 “한국은정말 모 든 게 좋 았다”며“사 람 들이나를 알 아 봐 주고 좋 아해 줘 서고마 웠 다. 힘든 순 간에도내 겐오 로지한국과축구생 각뿐이었고,그 래 서 귀 화할수있었다” 고한국에대한각 별 한마음을전했다. 관 건은 작 명이었다. 샤 리체프라는 러시아이 름 대신한국이 름 이 필요 했 다. 빠 르고 민 첩 하다는 뜻 의‘사리 첩 ’, 온몸 으로공을 잡 아 낸 다는 취 지의‘구 체 포 ’ 등다 양 한이 름 들이물망에올 랐 으나결국 팬 들이지어준 ‘신의손’을 택 했다.국내 호 적 엔 안 양 연 습 구장이있 는경기도구리시의신 ( 申 ) 씨 로등록했 다.국내첫 귀 화축구 선 수이자구리신 씨 1대시 조 가 된것 이다. 묻핆킮픦콞 , 쭖펞삲킪몶줆칺쿦 17개 월 만에한국인이 되 어 돌 아 온 신의손은 2000년불 혹 의나이로 그라 운드에 복귀 했다. 당시국내프로축구 사최고 령선 수다. 하지만기 량 은전 혀 녹슬 지않았다. 2000년 3 월 15일한국 일보 신문에서 조 감독은 그를 “나이 40이라고는 믿 어지지않을 정도로 순 발 력이여전하고 관 록까지 덧붙 어여유 가 넘 친다”고 평 가했다.실제신의손은 복귀 후치 른 대한화 재 컵 조별 리그 4경 기에서3골만 허용하며경기당실점률 0.75를기록했다. 신의손은“사실 귀 화후훈련을거의 하지 못 했다” 면 서도 “경 험 이많고, 한 국축구스타일을 잘알 고있었기에 곧 바로 투 입 될 수있었고, 컨디션 도 좋 았 다”고 말했다. 그가 굉 장한 화력을 뿜 어내 면 서안 양 은그해10년만에리그 우승을 따 냈다. 쭎캏펞솒 0 헞샎킲헞윮폺읺젾퍋 지 칠 줄 모르 던 신의손의 선 수 생활 에제동을건 것 은부상이었다. 복귀 첫 해 9 월 후 방 십 자인대가 파 열됐다. 그 는“전에도부상을많이당해 봤 지만이 건정말아 팠 다”며“무 릎 에서‘ 쫙 ’ 소리 가 났 고,너무아 파 서더이상경기에 뛸 수없을정도였다”고 말했다. 후 방 십 자인대 파 열은 재 활에만 7개 월 이걸리 는 큰 부상이다. 병원 에 선 축구를 만 류 했다. 40세라 는나이를감안하 면 사실상 선 수은 퇴 선 고나 다 름 없다. 하지만어 렵 게 복귀 한만 큼 쉽게 포 기할 순 없었다.신의손 은“ 근 력을키우기위해 매 일무 릎웨 이 트를 3세트 씩 했고, 다 른 훈련도예전 처럼계 속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이 듬 해인 2001년 실점률 0.8 ( K리그 기 준 ) 을기록하며다시한번레전드골키 퍼의부활을 알 렸다. 매 경기최 선 을 다했지만 나이 듦 에 따른 자연스러운 집중 력과 체력저하 는 막을 수없었다. 신의손은 “2004년 에이미내축구는끝이 났 다고생각했 다”며“ 앞 으로어 떤역 할을할수있을 지고민끝에골키퍼 코 치로 방향 을 틀 었다”고말했다. 픎 힎솒핞옪핆캫 2 잗폺엲 2005년은 퇴 한신의손은FC서 울 골 키퍼 코 치에이어경남FC, 대교 캥 거 루 스 등을 거 쳐 2009년대한민국 U - 20 축구국가대표팀골키퍼 코 치까지 역 임 했다.이후로도여러팀에서골키퍼 코 치로 활약하다 2022년부터는 천안시 티 FC의 U - 18 팀인천안공 업 고등 학 교 축구부골키퍼 코 치로활동하고있다. 그에 겐 지도자로서이 루 고 싶 은 꿈 이 있다.신의손은“한국축구는내전부이 고,내인생”이라며“ 계 속한국에서한국 축구를지 원 하고한국축구를위해일 하며한국축구가 발 전하게 돕 는 것 이 지 금 의내가장 큰 목표”라고말했다. 이목표를이 루 기위해지 금 도 체력 관 리를소 홀 히하지않는다.여전히 술 , 담배 는전 혀 하지않는데다 매 일 선 수 들과훈련하는건기 본 , 선 수들보다 먼 저나와서운동장을뛰기도한다.신의 손은“내가올해64세인데,신체나이는 45세정도 밖 에안 될 것 ”이라고 너스 레를 떨 며“ 코 치라고해서말로만이거 해,저거해하지않고직 접킥 을 차 거나 공을 주고받아야 하기 때 문에체력 관 리가 필 수”라고강 조 했다. 천안=김진주기자 <3>신의손천안공고골키퍼코치 ᇑ⇍ລ᾽⇍ 소련최고수문장발레리샤리체프 1992년일화이적3연속우승견인 4년간‘0점대실점률’GK중요성입증 ‘신의손’불리며일약스타로떠올라 외국인골키퍼출장금지위기 40세에한국으로귀화하며극복 안양 10년만에리그우승시켜 2005년은퇴, 지도자로인생2막 “한국축구발전돕는게내목표 매일체력훈련$신체나이45세” 신의손천안공업고등학교골키퍼코치가지난달20일충남천안종합운동장에서본보기자와인터뷰하기전포즈를취하고있다. 천안=신용주인턴기자 2008년초·중학교여자골키퍼선수들을대상으로실시한대교여자축구단골키퍼클리닉에서신의 손당시대교GK코치가직접강사로나서코칭하고있다. 스포츠한국자료사진 일화천마소속당시신의손이몸을날려볼을잡아내고있다. 한국일보자료사진 2000년3월22일자한국일보지면. 한국일보자료사진 ‘신’이라 불린골키퍼 한국 축구 약손으로 1992 뼒픎묻옪 묺펞 삲앎 핳핂핊펖섦삲 . 믆콚엶 몮픦 쿦줆핳짪엖읺캲읺 (64) 많 묻픊옪뻦펂퐎 4 뼒맒 ‘0 헞샎 킲헞윮 ’ 핂앎팣솒헏짷펂엳픒컮쫂핂젾 샎퍋픒 삲 . 쫊픒잗쁢쁳엳핂 많 ‘ 킮 ( )’ 픦몋힎펞핂읂엎삲컪 슲픎믆읊 ‘ 킮픦콞 ’ 핂않쭖엎삲 . 킮픦콞픎몶 (GK) 픦훟푢컿픒 잗펾멚핆킫몮핖섦샇킪묻 옪 묺몒펞 ‘GK 앎핂얾멑핂삲 ’ 읊 좆콚쫂펺훊젾핊퍋샎큲 옪 썮폺앞삲 . 펆옮픎몋믾쌚잖삲믆픦 퍋픒샎컪삲 . 훊헒뫃멷쿦빦 쿦찒쿦많팒삚몶 많믆 옫 훊졷짩쁢멂킮픦콞핂 픚핂펖삲 . 짪묾픦킲엳쌚줆펞뺂 혚힎잚 , 멾묻 쏞킲엳쌚줆펞뮎밚힎멚쇪 헒컲픦몶 킮픦콞픒힎빪삺 20 핊 빶 팖홓풂솧핳펞컪잚빺삲 . 안양LG시절신의손. 한국일보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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