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4년 8월 7일 (수요일) 오피니언 A8 자동차안전벨트(Seat Belt) 최선호 보험전문인 - 보험, 그것이알고싶다 전문가칼럼 자동차의 안전벨트를 매지 않 으면 경찰의 단속에 걸릴 수가 있다. 운전자의 안전을 위해 안 전벨트를 착용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본인의 차량으로 본인이운전하는것인데,안전벨 트를매지않고운전하다가사고 가나서다치면본인개인에게만 손해가 발생한다. 즉 전혀 남에 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데, 왜 안전벨트를매지않았다고공권 력인 경찰이 굳이 단속하는 걸 까?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안전 벨트를매지않고운전하면안전 벨트를 맨 때보다 더 크게 다칠 수있고, 이때문에교통의흐름 을더방해할수있다는것이그 이유라고한다. 즉, 다른여러사 람에게간접적으로폐를끼치는 셈이 되어 사회비용이 더 많이 지출되므로 안전벨트를 강요한 다는것이다. 이외에도 그야말로 인도주의 차원에서그런다는해석도있을 수 있고, 부상이 심하면 보험회 사의 지출이 더 많아지므로 보 험회사의입김이작용해그럴수 도 있다는 해석이 있다. 좌우간 안전벨트를 사용하는 것이 좋 다. 안전벨트를 영어로는 Seat Belt라고한다.영어를직역하면, ‘좌석벨트’라고말하는것이정 확하지만,우리말로는대개안전 벨트라고부른다.혹은안전띠라 고도 한다. 북한에서는‘걸상끈 ’혹은‘박띠’라고부른다. 지금 은 거의 모든 자동차에 안전벨 트가장착되어있다. 과연 자동차가 처음 개발되어 만들어졌을 때부터 원래 안전 벨트도 개발되어 장착된 것일 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자동 차가 개발된 지 70년 가까이 지 난1936년경에나안전벨트에대 한아이디어를갖게되었다고한 다.본격적으로개발되기시작한 것은 1946년 미국의 한 병원에 서 응급실로 운송되어 온 환자 를보고안전벨트의필요성을절 실히깨닫고병원측이필요성에 대한의견을발표했다. 그러다가 안전벨트가 본격 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9년 스웨덴의 볼보사가 자 동차를 생산하면서 안전벨트를 장착하기시작했다. 안전벨트는 원래 비행기에 장 착한 것이 먼저라고 한다. 비행 기가 자동차보다 훨씬 빠를 뿐 만 아니라, 곡예비행도 해야 하 므로 몸을 안전하게 묶을 필요 가 먼저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행기가생긴초창기에도 안전벨트에대한개념이없었는 데, 곡예비행을하면서비행사가 떨어져죽는사고가생기고나서 야안전벨트에대해생각하기시 작했다고한다.우리가기대하는 것보다사람들이훨씬미련한가 보다. 현재는미국거의모든주에서 안전벨트착용을의무화하고있 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다가 단 속에걸리면적잖은벌금을내게 된다. 예전에는 운전자와 조수석에 서만 매면 됐었지만, 지금은 뒷 좌석에서도벨트를착용해야한 다.그런데미국에서는버스에서 는 벨트가 장착되어 있지 않은 예가많으며, 버스에서안전벨트 를 매지 않아도 단속에 걸리지 않는다고한다. 미국당국의통계에따르면, 안 전벨트만잘매어도자동차사고 에서 사망할 확률을 45%나 줄 일수있다고한다. 아무리 짧은 거리를 운전한다 고 해도 항상 안전벨트를 착용 하는 것이 좋다. 안전벨트를 착 용할 때 유의해야 하는 사항은 다음과같다. 안전벨트는몸에꼭맞게매는 것이중요하다.안전벨트를몸에 꼭 맞게 매면 몸이 부자연스럽 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 실이다. 그렇다고해서안전벨트 를 너무 느슨하게 매면 사고 때 부상을 줄이는데 별로 효과를 볼수없어매지않는것이나매 한가지라고 한다. 한쪽 어깨를 지나 가슴 부분을 감싸게 되어 있는끈을절대등뒤로가게하 거나겨드랑이밑으로넣어서는 안된다. 등뒤로가게하거나겨 드랑이밑으로넣었다가다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리고 아랫 부분의 끈은 복부에다 매는 것 이 아니라, 허리 부분에다가 매 야한다. 복부에매고있다가복 부에 부상이 발생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안전벨트 착용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의무사항임을이해하고 알아두는것이좋겠다. (보험 전문인 최선호 770- 234-4800) 그날도 한국 언론들이 전하는 뉴스는 온통 MBC에 관한 것이 었습니다. MBC 여기자 출신 어느 인사 가 한국방송통신위원장으로 임 명 강행됐는데 이는 정권후반기 MBC를 장악하기 위한 윤석열 정부의 계획이었다느니, 그래서 MBC는9월중에큰소용돌이에 빠지게될것이라느니, 하는흉흉 한소식입니다. 문뜩 80년 여름에 내가 겪었던 언론인 대학살의 기억이 떠올라 안타까워하고있는사이미국서 부로부터다른비보가전해왔습 니다. MBC 라디오 제작국장과 보도 제작국장을 지내신 김준철 선배 님의 부음입니다. 평생 MBC를 그토록 사랑하셨던 선배님이 하 필이면 MBC가 큰 곤경에 처한 이런때가시다니…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서부에서 멀 리동부로옮겨와살다가가까운 분의부음을들으면가슴이메어 집니다. 선배님은 4년 전에 45년 간 사 시던남가주를떠나따님이사는 북가주로가신뒤남다른효도를 받으며 건강도 회복되고 편안하 게계신다는소식을종종듣고있 었습니다. 선배님에게는최초라는수식어 가많이따릅니다. 1961년 12월에 방송을 시작한 MBC라디오의개국요원으로스 카우트돼방송에서처음으로PD 기능을 시작하셨고 방송국이 세 들어있던인사동가구점한모퉁 이에 라디오 생활정보센터를 만 들어 라디오의 동시성과 생활정 보기능을 개척한 공로가 남다릅 니다. 장인숙 선배님을 만나 아나운 서부부가되신선배님은텔레비 전개국준비요원으로발탁돼영 국의톰슨텔레비전칼리지에서 수학하신 뒤 1969년 8월에 개 국한 MBC 텔레비전에서 최초 의모닝쇼앵커로활약하셨습니 다. 그러다가1975년초대MBC미 주지사장으로 발령받아 로스앤 젤레스에 오셔서는 한국 방송의 미주보급에선구자적역할을하 셨습니다. 이 무렵 한국에서는 80년 5월 전두환 군부가 광주에서 야만적 인 참극을 벌여놓고는 이에 대 한 보도를 못하게 하자 MBC를 비롯한모든언론사중견기자와 PD들이검열과제작거부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리고그해7월주동자급언론 인들을 대량 해직시키는 만행이 벌어져MBC에서만78명에달했 습니다. 이들에게는국내취업마저금지 돼 MBC 해직동료가운데 8명이 나식솔을이끌고정처없이미국 으로건너왔습니다. 이때 김준철 선배님이 후배 이 민자들을 당신의 일처럼 아파하 시고따뜻하게맞이해주셨던일 을잊지못합니다. 그런 선배님이 다음주 북가주 로스알토스의한가톨릭묘지에 서영면하시게됩니다. 선배님, 그곳에서도 그토록 사 랑하셨던 MBC와 MBC 후배들 이큰어려움겪지않게지켜주시 기바랍니다. 그리고바라기로는권력자들이 그무서운탐욕의멍에를벗어버 리고바른길로나오기를원합니 다. 여권 성향의 어느 신문 칼럼 이 지적한 것처럼 제발‘백성들 을 바보로 여기지는’않았으면 합니다. 89 평생을 뜨겁게 사시다가 뜨 거운 8월에 떠나시는 선배님, 그 러나우리는그여름만이아니라 따스한 봄날에도, 바람 부는 가 을에도 그리고 적막한 겨울날에 도선배님과함께했던날들을잊 지못할것입니다. 잊지 않으면 이별은 없다고 했 습니다. 선배님과는 이별을 하지 않았 습니다. MBC 그리고 김준철 선배 삶과 추억 김용현 뉴저지 대선 올림픽 시사만평 제프코터바작 케이글 USA 본사특약 대선 올림픽 90분간토론달리기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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