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5년 1월 30일 (목요일) D6 기획 2025년1월27일월요일 “원망대신평화를염원”$히로시마비극세상에알린‘피폭자의얼굴’ 가만한당신 세상에서가장더디게쓰는부고 사사모리시게코 이들이세상에나왔지만나는그들의미래도 염려한다.” ‘힘을통한평화’를기치로이듬해 집권한 로널드레이건행정부는 ‘전략방위구 상’을앞세운핵전력증강정책을고수했다. 미국은 45년가을 ABCC의공식성명즉 “원폭 방사능에기인한 사망자는더이상없 고,잔존방사능에의한생리적영향도보이지 않는다” ( 오에겐자부로 ‘히로시마 노트’ ) 는 입장을전후약 10년간 고수했다. 그사이수 많은이들이백혈병과 각종암, 원인모를질 병으로 숨져갔다. 노벨상 작가 오에겐자부 로는 1965년출간한저책에, 현지매체인‘주 코쿠 ( 中国 ) 신문사’ 조판부에‘방사능’이란낱 말을 조판할 활자조차없었다는 사실을 지 적했다.그 10년의강요된침묵은 1954년3월 마셜군도비키니섬의미핵실험당시인근해 역에서조업하던일본 참치어선선원 23명이 피폭돼1명이숨진뒤에야깨졌다.일본 시민 들은비로소원수폭금지서명운동에나섰고, 그여세로피폭자들의본격적인증언과의료 - 시민단체등의실태조사가이뤄졌다. 55년‘제 1회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열렸고,이듬해인 56년에야피단협이출범했다. 미국과소련의핵실험및보유를두고피단 협내공산당과사회당계열이이념적으로대 립하다끝내분열한사실은널리알려져있다. ‘히로시마처녀들’을두고도비판 - 비난하는이 들이있었다.핵가해자인미국을관대한치유 자 - 구원자처럼치장하는도구로이용됐다는 주장, ( 잠재적군인인 ) 남성은일절배제하고 오직젊은미혼여성들만선택함으로써여성 성을대상화했다는비판등등.미국인들,특히 태평양전쟁에서아들과남편을잃은이들중 에는피폭의비극조차전범국국민이마땅히 감수해야할 ‘정의’이자교훈의매질이라여기 는이들이적지않았다. 사사모리는자신 ( 들 ) 을흘겨보는그들의시선도견뎌야했다.그가 스스로를‘세계시민’이라정체화한까닭에는, 전후냉전국면에서정치적위세를되찾은일 본극우세력의무도한호전성과그걸빌미로 반일민족감정을부추기는주변국선동가들 의적대적공생에대한우려도있었을것이다. 스웨덴 작가 스티그 다게르만 ( S t i g Dagerman ) 은 46년전후 독일인들이겪던 추위와굶주림의비참을취재해기록한책‘독 일의가을’에서,“독일의고통은집단적이지만 독일의잔학행위는 집단적이지않았기때문 에” 전면적인고통을 정의로 간주하는 것은 법적으로나도덕적으로옳지않다고주장한 바있다.오에겐자부로는 “히로시마 사람들 은죽음에임할때까지침묵을지키고싶어한 다”는한의사의편지를책에인용했다.“원수 폭반대따위의정치적투쟁에이용당하는참 고자료로자신의비참을드러내고싶지않다 는 감정, 피폭자는 모두 구걸이나 하는 비렁 뱅이로간주되고싶지않다는감정”때문이었 다. 물론당당히나선수많은 ‘히바쿠샤’들도 있었다.사사모리는과거에대한원한과분노 를경계함으로써자신의인간적가치와 존엄 을지키고자했다.“처음엔내게도 ‘왜내가…’ 하는원망의마음이있었지만,살면서내정체 성은달라졌다.이제나는히로시마와나가사 키의비극이다시는없어야한다는것에만몰 두할 뿐”이라고 말했다. 사사모리가청소년 강연때마다 ‘분노의춤’이란걸가르쳤던것 도그래서였다.이런저런일로분노가치밀때 면허공에대고고함을지르거나발을구르며 스스로 해소하되, 결코 상대에게그 화를 풀 려고하지말라는거였다. 사사모리의결혼여부등‘히로시마처녀’로 서의삶이외의사생활은거의알려진바없다. 그는 예술과 과학을 통한 청소년평화운동 단체인유엔산하 ‘Youth Arts New York’ 에서‘히바쿠샤 스토리’ 프로젝트를 무대삼 아주로활동했고 2003년장암진단을받고 수술 후 회복된뒤부턴 말년까지피단협활 동에도적극 동참했다. 사사모리는 62년낳 은아이 ( Norman Cousins Sasamori ) 에 게영적인아버지인커즌스의이름을 선물하 며“너를결코전쟁에휩쓸리게하지않겠다” 고다짐하듯말했다.“너는다른사람을죽이 거나스스로죽기위해서가아니라,나와세상 사람들을행복하게하기위해태어난사람이 야.” 최윤필기자 자신들의처지와 미국 의료진의상황을 충 분히이해하고있었고 “우리는 그들 10대소 녀들의거리낌없는발랄함에이내전염됐다” 고,67년책‘Present Tense:An American Editor’s Odyssey’에썼다. 최종선발전날 저녁특별기도회에서소녀들은두가지를기 도했다고한다.“우리모두를데려가지못하 는현실때문에미국의사들이힘들어하지않 기를.” 그리고 “남겨진이들때문에선택받은 이들이힘들어하지않기를.” 의료진은 5명을 늘려25명을선발했다. 그중한 명이사사모 리였다. ‘히로시마처녀들’은언론의뜨거운주목을 받으며55년5월부터이듬해1월까지각각수 차례씩총 138회안면복원및피부이식수술 을받았고,수술도중숨진1명을제외한 24명 은 새얼굴을얻어일본으로 귀국했다. 다수 는 결혼했고, 사회복지사로, 디자이너로, 전 화교환원과 비서등으로서각자의삶을 살 았다. 그들과동행했던일본인의사 3명은미 국의선진성형기법을익혀남은이들을도왔 다.체류기간을커즌스의코네티컷집에서그 의세딸과 함께보낸사사모리의꿈은간호 사가 되는 거였다. 그는 커즌스의제안으로 59년다시미국으로건너가그의수양딸처럼 지내며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시더스 시나이메디컬센터’에서교육받고간호조무 사가됐다. 그는 주로신생아실과 파킨슨병 동에서근무했다. 1980년 6월, 핵전쟁에대비한미상원의료 보건소위원회청문회에서사사모리는 “다시 는핵전쟁이없어야한다는사실을말해야할 사명이내게있다.핵무기가얼마나끔찍한것 인지, 당시아이였던우리가어떤일을겪었는 지알려야하는사명이다.이제그아이들의아 신한덕에중상을면했고,그날부터현장에서 생존자들을도왔다.영어에능통했던그는미 국인저널리스트존허시 ( John Jersey ) 가쓴 “2차대전의핵홀로코스트”에대한최초의논 픽션인‘히로시마 ( 1946 ) ’의주요증언자였고, 책출간이후미국에초대돼 31개주주요도 시를돌며원폭의참상을알렸다. 문예비평주간지‘Saturday Review’ 편 집장이던저널리스트노먼커즌스 ( Norman Cousins, 1915~1990 ) 와도 그러면서 친 분을 쌓았다. 커즌스는 ‘히로시마평화 센터협회 ( Hiroshima Peace Center Associates ( HPCA ) ’란 단체를설립, 49년 부터‘도덕적입양 ( Moral Adoption ) ’,즉원 폭 고아원을 짓고 직업교육 등을 통해아이 들의자활을 돕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평화 활동가이기도했다.다니모토는그에게‘히로 시마처녀들’의처지를알리며도움을청했고, 커즌스는 53년히로시마를방문해다니모토 의교회에서약 35명의 10대피폭 소녀들을 만났다. 커즌스는HPCA 실무진과함께성형수술 비용과항공 - 체류비용모금에나섰지만초기 엔아무성과가없었다.냉전기운이달아오르 던때였고,일본 반핵평화운동을 반미성향 의일본공산당과사회당계열이주도하던때 였다.전범국일본에대한미국인들의복수심 과적개심이여전히시퍼렇던때이기도 했다. 일부자선재단은이념적시비를우려했고,어 떤재단은일부피해자만대상으로한활동의 편파성을경계했다.수술도중숨지거나하는 등의불상사와 책임을 우려한 곳도있었고, 재단 규정에그 사안을 후원할 근거가없다 고답한곳도있었다. 돌파구는 뉴욕 마운트시나이병원의저명 1945년 8월 6일월요일아침,일본 히로시 마의13세소녀사사모리시게코 ( Sasamori Shigeko, 당시성은Niimoto ) 는도심교바 시강을가로지르는나카구쓰루미다리서쪽 끄트머리에있었다.히로시마여자상업학교 1 학년이맡은청소구역이거기였다.징집을면 한고령의남자들이공습대피경로에장애가 될 만한 건축물들을 철거하면그 잔해를 치 우는일.미군폭격기의‘불폭탄 ( 소이탄 ) ’소문 은무성했지만당시히로시마는폭격을당한 적이없었다.공습경보도없이평온하던오전 8시15분,사사모리는청명한하늘을날던미 군기가 하얗게반짝이는뭔가를 떨어뜨리는 걸보며곁에있던친구에게말했다.“참아름 답다.”그러곤의식을잃었다. “얼마뒤깨어났지만아무것도보이지도들 리지도않았어요.그냥캄캄했어요.그러다짙 은안개가걷히듯어슴푸레주변이보였어요. 완전히달라진풍경. ( … ) 화상으로벌겋게피 부가 벗겨진 몸으로 강에뛰어드는 사람들. ( … ) 정신을차릴수가없었어요.그때아이울 음소리가 들렸어요. 화상을입은엄마가 그 와중에도열기에그을린아이에게젖을 물려 달래려하고있었어요. 그제야정신이돌아왔 어요. ‘이게말로만 듣던불폭탄이구나’ 생각 했어요.그냥불폭탄이요.” 그는 불폭탄이또 떨어질 거라는 사람들 말에놀라그들을따라약 1㎞를걸어미나미 구의대피소로 피신했다. “아프진않았어요. 아무 감각이없었어요.” 하지만 그는얼굴과 상반신, 두팔과두손까지심한화상을입은 상태였다. 대피소에도착한그는열기에엉겨 제대로열리지도않는눈과입으로주변을두 리번거리며하염없이자기이름과집주소를 외치며부모님을찾았다.어머니는피폭닷새 째에야딸을찾아냈고아버지는그를알아보 지도못했다. 55년시사주간지‘Time’은 “머 리카락도눈썹도턱도거의사라지고없었다. 얼굴아래쪽절반이녹아내려목구멍속으로 사라진것처럼보였다”고 당시그의용모를 묘사했다. 어머니는딸의살갗에엉겨붙은천조각들 을 떼어낸뒤식용유를 바르고 고름을 닦아 내며간병했다.그는기적적으로살아남았다. 그리곤여러사람의도움으로미국서성형수 술을 받고 ‘얼굴 ( 의일부 ) ’을되찾았다.‘히로 시마처녀들 ( Hiroshima’s Maidens ) ’이라 불린 25명의여성중한 명인그는남은생을 ‘히바쿠샤 ( 被爆者 ) 의얼굴’로서,일부의냉소 까지견디며유엔과미의회에서증언하고여 러행사에서강연하며언론인터뷰와다큐멘 터리등을통해원폭의진실을세상에알렸다. 피폭 80주년을약반년앞둔지난해말,‘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 ( 줄여서피단협 ) ’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알려진직 후그가별세했다.향년92세. 전후미국의일본원폭피해조사단 ( ABCC ) 은 1차피해 ( 충격파와열복사선 ) 로히로시마 에서만약 12만 명이숨졌고, 외상 후유증과 방사능피폭 ( 2차피해 ) 까지합치면 5년간약 20만명이숨졌다고집계했다.당시히로시마 인구 ( 30만명 ) 의2/3였다. 이런표현을써도된다면, 사사모리는기적 적인행운의주인공이었다. ABCC가 분석한 바폭발반경0.5마일 ( 0.8km ) 이내의10명중 9명이사실상즉사했고 1마일이내생존자는 대부분건물안에있던이들이었다. 사사모리 가있던곳은그라운드제로에서약 1㎞떨어 진실외였다. 하지만삶을잃었다.얼굴이망가지고남은 피부도 검붉은 화상 흉터 ( 켈로이드 ) 로얽은 ‘아카오니 ( Aka Oni, 붉은악마 ) 들’. 사사모 리처럼어리고젊은여성들은 수치심과절망 감에스스로를 가두고 주로 밤에만 잠시집 밖을나서보곤했다. 그런어느밤, 사사모리 는 찬송가 소리에이끌려그곳으로 갔다. 원 폭참상을세상에알린선구자중한명인다 니모토기요시 ( 谷本 ␵ , 1909~1986 ) 목사의 히로시마연합감리교회였다. 다니모토는신학 ( 関西学院大 ) 을전공한뒤 장학생으로미국 조지아주애틀랜타의에모 리대캔들러신학교를 졸업하고전시인 43년 귀국했다. 피폭 당일교회마당에서일을 하 던그는섬광을본순간커다란바위뒤로피 성형외과의아서바스키 ( Atrhur J.Barsky ) 등 3명의의사가선뜻 동참하면서열리기시 작했다. 병원측도 1인당최소 3, 4차례수술 비와 4~5개월입원비를 무료로 해주겠다고 나섰고, 뉴욕 퀘이커기독교인들이수술 전 후체류기간동안대상자들을각자의집에서 돌보겠다며자원했다. 커즌스의지인이던도 쿄영자신문 ‘니폰타임스 ( Nippon Times ) ’ 발행인도가사키기요시는당시미극동사령 부 ( FECOM ) 사령관이던 존 E. 헐 ( John E. Hull ) 을설득해공군수송기를확보했다.수 술후귀국편은팬암사가제공했다. 바스키등의료진은약 한 달간 휴가를얻 어자비로일본으로 건너갔다. 결핵등 다른 질병은없는지,성형 - 안면복원기술로유의미 한성과를낼수있을지등을 판단해희망자 43명가운데 20명을 선발하기위한 출장이 었다.그들은선택받지못한소녀들이겪게될 또한번의절망, 소녀들간의과열경쟁등을 염려하며심리적으로 무척위축됐다고한다. 프로젝트자체를경계한이들도많았다.이데 올로기선전용으로활용하려는것이냐, 배후 에미국정부가있는것은아니냐···. 소녀들을 서커스볼거리로활용하려한다는소문까지 돌았다. 훗날 커즌스는 “오히려소녀들이우리를 응원하고 격려했다”고 회고했다. 소녀들은 수치심에고립된어린여성피해자 1945년히로시마살던 13세소녀 폭격지점 l떨어진곳에서피폭 부모도못알아볼만큼심한화상 세상으로나온 ‘히로시마처녀들’ 감리교목사기요시^언론인커즌스 피폭소녀들알리고성형수술지원 사사모리등 24명치료받고제2인생 “결코전쟁에휩쓸리게하지않겠다” “전범국이감수할매질”비난에도 사사모리, 과거에대한분노대신 인간존엄지키며반핵운동노력 㐰ㅑሥᲥ᎑♡ଉອ㐱℡߹ඍ㍘¤ʄʳɮƞɵ)ʄ˧˂ȹɵ˂℡㋈㋐㋍㋎଍☎ 㐰Öʳǧ˂ǧɵ˒óǧɵ˂ǧ㍙ ɵ ɮǧʳȹNjƞɵ@Ǖȹ˒ʄʳ㐱˂±Ǖ̹˂˂ǧ̹㐱ᾙ᫥ 피폭직후의폐허속에담벼락만겨우남은히로시마나 가레가와연합감리교회. 사사모리는저교회에서은인 인기요시다니모토목사와자신처럼얼굴을잃은또래 소녀들을만났다. worldwar2database.com 1980년원폭의참상을 증언하기위해미상원청문회 에증인으로출석한사사모리(맨왼쪽). AP연합뉴스 ▲ 1945년일본히로시마원폭에얼굴과상반신, 두손에심한화상을입은 13세소녀사사모리시게코는 1955년미국서성형수술을받고 새삶을얻 었다. 그는짙은화장과세월의흔적으로도온전히가려지지않는 ‘히로시마 의얼굴’로서평생핵무기의잔인한진실을 세상에알리며반핵평화운동에 헌신했다. hibakushastories.org Ӝ 피폭1년전인1944년의사사모리. 1년뒤그는미군기가떨군 ‘불폭탄’이 햇살에반짝이며낙하하는모습을보며참아름답다고감탄하게된다. 위키피디아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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