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5년 4월 28일 (월요일) � � ��� � �� 어렵게고향으로돌아왔지만고된 삶이이어졌다.위안소에서내내그리 워했던어머니는딸을잃었다는슬픔 에몸져누워박씨가 돌아온 지얼마 안돼세상을떠났다. 이후 박씨는 오징어잡이 배를 타 는 남자를 만나 자식 7명을 낳았지 만홍역에5명을잃었고,이후아이들 아버지마저일찍하늘로떠나보냈다. 박씨는 “셋째딸이랑 막내아들만겨 우붙들었다”고했다. 박 씨는 어 떤엄마였느냐 고 묻자 남씨 는 자세를 고 쳐 앉으며 “잔 소리가무지많 았어요”라고 즉답했다. 남 씨가 초등학 생때친구들이 낚싯대를 매고 연못가에놀러 가는 걸 따라 나서면 박씨는 “물에 빠져 죽 는다”며 곧장 아들을찾아왔 다. 하교 후엔 자전거페달을 빠르게밟아집 에일찍도착해 야 했다. 조금 이라도 늦으면 박씨가아무나 붙잡고 “왜 우 리 열이 � 당시 애칭 � 안 오냐” 고묻기때문이었다. 잔소리많고억척스럽기만했던엄 마.자식둘먹여살리려남의밭을매 고 산나물을 캐러다니느라 손가락 이다 굽어도 박씨는힘든 내색을 하 지않았다고했다. 남씨는어느새다 늙은어머니를 가만히보며말했다. “알고 보면 자식다 먼저보내고 남 은자식도우예될까봐그러신것같 애요. 내그엄마마음을이제이해하 겠더라고.” 박씨는어린남씨를 앞에두고 간 혹뜻모를말을할때가있었다.“야 야,내일본가서호되게고초를당했 데이” “일본 놈들은 독종이데이”. 당 시남씨는 ‘일본은예의바른나라라 고 배웠는데왜?’라고 생각할 뿐 대 수롭지않게여겼다. 가끔엄마가기 본적인일본어는물론일본욕설까지 잘알고있다는게신기하기만했다. 그게어떤의미인지는 20여년이지 나남씨가 30세가다돼서야알았다. 대구로 출가해택배 자영업으로 생 업을 꾸리느라 바빴던 남씨는 우연 히본가에들렀다가우편함에서종이 한장을발견했다. 박씨가고심끝에 면사무소에서등록한 일본군 ‘위안 부’피해자신고문서였다. “하늘이무너졌지,뭐.” 남씨는 그때를 떠올리다 겨우 한 마디를 말하곤 눈물을 터뜨렸다. 왜 진작엄마에게일본에서어떤일을겪 었는지묻지못했을까. 하염없는 회 한으로 오랫동안 괴로웠다고 했다. “지금 와가 이래 얘기하지, 그때는 다들 � ‘위안부’ 피해를 � 흉으로 봤다 고.친구들한테도차마얘기를몬했 어요.” 그날이후 남씨는 박씨를 대구 집 으로 모시는 날이면 포항에서대구 까지고속도로를내달리며피해내용 을 상세히질문했다. 아들이물어봐 주기만을기다렸던걸까. 박씨는 남 씨에게만큼은 위안소에서의상황과 심정을구체적으로털어놨다.그렇게 한 시간 분량이넘는 녹음 파일총 3 개가나왔다. 남씨는누가들을까 봐 녹음 파일 소리를최저로 낮추고 혼자서그 파 일을 듣고 또 들었다고 했다. 10년 이넘는기간을 닳도록 듣던파일은 약 3년전쯤 휴대폰에난 오류로 허 무하게사라져 버렸다. 남씨 는 “돈뭉치를 잃은 것보다 더 아까웠다” 고 말했다. 그 때처럼구체적 인 증언을 다 시들을기회가 더는 없을 거 란 생각 때문 이었다. 이날 인터뷰 처럼 박씨가 낯선 사람 앞 에서 말을 아 낄 때면 남씨 마음은 더욱 쓰려진다. “엄 마는 계속 ‘모 른다’ ‘말로 다 몬 한다’ 이러 는데 내는 하 나부터열까지 다 알거든요. 엄마가 남들 한테는어딘가 모르게100%오픈을안하니까내한 테처럼솔직하게얘기해주면좋겠다 싶지요.” 박씨는 혹여 ‘위안부’ 피해사실이 자식들에게해가될까신고이후에도 남씨가 나서는걸말려왔다고한다. 남씨가 ‘위안부’피해관련행사나모 임에나가려할때마다박씨는“참아 라”“좋은게좋다”며계속붙들었다. 남씨는 “TV에나올것같으면손으 로얼굴 가려가면서엄마 몰래행사 를다니고있다”고말했다. 당장생업이바쁜 요즘, 남씨는 매 번 상경하기어려워 유튜브로나마 수요집회를 챙겨보곤 한다. 화면에 는수요집회뿐만아니라건너편에서 ‘위안부 가짜’를 외치는 반대집회의 모습도 함께비친다. 남씨에겐 차마 눈뜨고지켜볼수없는광경이다.그 는“뼈에사무치고피가거꾸로솟는 다”고했다. 박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위안 부’ 역사를 끝까지알려야겠다는 결 심이더굳어진것도 그래서다. 남씨 는소리높여말했다.“정치하는큰사 람들 얘기만 역사입니까. 후대사람 들이우리엄마 역사도 제대로 알아 야지요.” 이날박씨는인터뷰가어려운와중 에도 “내가 죽어귀신이돼도알아서 � 일본으로부터사과받고 � 해주소” “죽은귀신이라도알고있을일이다” 라는 말만큼은 또렷하게했다.이에 남씨도거들었다.“엄마가 ‘죽은귀신 이라도알게해달라’안캅니까.내는 엄마 돌아가시면더큰소리를 낼끼 라. 내일본을쫓아가든지해가떳떳 하게일본한테보상도 사과도 받고 요. 엄마 산소에가가 ‘엄마, 내사과 받았다’얘기할낍니다.” “일본 놈들은 독종” 뜻 모를 엄마의말은 ‘위안부 증언’이었다 “탈출들켜밤새죽도록맞았다”입열게한기록자의끈기 <1> 생존자박필근할머니의곁 “어릴땐흘려듣다서른쯤알게돼” 우편함속‘위안부피해’신고문서 ‘왜진작묻지못했나’회한의눈물 아들이질문하니피해구체적증언 “남들앞말아낀엄마보면속쓰려” 변소수챗구멍으로위안소탈출후 남편·자식5명잃고억척스러운삶 “엄마돌아가셔도日사과받을것” ������������������������� ����� ��������� “담밑에밤새도록내사맞아죽었니 더.안죽어살았니더.” 위안소 탈출을 처음 시도했다가일 본군으로부터심하게구타를 당했던 당시를 할머니는이렇게말하고있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박필근 � 97 � 할 머니와 그 가족의구술생애사 자료집 엔‘위안부’피해부터그이후삶을개척 해온여정,아들남명식 � 62 � 씨의증언까 지놀랍도록상세하게적혀있었다. 이구술생애사자료집이나오기까지 는 김은주 포항시의원의노고가있었 다.그는2018~2022년포항여성회장을 지낼 당시박씨의구술생애사 작업을 사업으로기획,구술집을완성했다.TV 다큐멘터리‘박필근프로젝트’와창작 판소리‘박필근뎐’제작에도참여했다. 김의원은회장직에서물러난지금도 박씨자택을 주기적으로찾는다. 지난 달 18일경북포항시남구포항시의회 에서만난 그는 “ � 박씨는 � 친할머니와 다름없다”며“지금도 ‘잘지내실까’‘날 찾으실텐데’라고수시로생각한다”고 전했다. 2019년구술생애사작업초기, 김의 원은박씨를자주찾을수밖에없었다. 일상 대화까지는 잘 나누다가도 결정 적으로위안소얘기를꺼내면박씨가입 을열지않아서였다. 김의원은 “먼거 리를찾아갔다가아무얘기도못듣고 빈손으로돌아온적이적지않았다”고 말했다. 당시김의원은박씨를총열번가량 찾았다.자택을대여섯번방문했을때 쯤엔‘계속이러는게맞나’고민이들기 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꼭피해내 용을억지로 듣지않더라도,이후의삶 을남기는것도의미가있겠다싶었다” 며“작업을그만둬야하나생각한적은 한 번도없다”고 말했다.이후 박씨가 끝내김의원에게마음을열면서자료 집엔‘위안부’피해얘기도담겼다. 자식 다섯을 모두 제 손으로 산에 묻은 얘기, 독학으로 글을 깨우쳤다 는얘기. 박씨생애를들을수록김의원 은 박씨가 “위대하다”고생각했다. 그 는 “할머니가 ‘남한테아쉬운 소리안 했다’ ‘내가 다 벌어먹었다’라며생활 력을 자부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며 “피해자라는 단어에 눌려 수동적 인인물로비칠분이전혀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씨는김의원에게그저정많은할 머니이기도 하다. 시골에서다니는 길 위험할까, 사위가 어두워진다 싶으면 박씨는 늘 김의원에게“얼른 가라”고 채근했다. 떠나는김의원손에뭐라도 쥐어주었고, 줄게없으면고구마를삶 거나상추라도뜯어들려보냈다.김의 원은“기력이더괜찮으실땐배웅을나 와차가안보일때까지손을흔들어줬 는데,그모습이꼭친할머니같아그렇 게울컥했다”고전했다. 김의원은구술생애사작업에진심을 다한건맞지만스스로자료집이얼마 나의미가있는지실감하게된것은얼 마 되지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당 시에는또다른일들을병행하느라몸 을 혹사했던 데다, 나로선 자료집을 볼수록 오탈자 같은 아쉬운 점만 자 꾸 보여의미를 느끼기가어려웠다”고 말했다. 자료집을 내고서약 3년이더지난 2023년, 그때야의미는새롭게다가왔 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산하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가 프로젝트 사업 의일환으로 김의원을인터뷰했는데, 인터뷰 자리에서그는 ‘위안부’ 문제와 지역성연구에대해설명했다. 이때구 술생애사 작업과정을 자세히설명하 던중그는 불현듯구술생애사작업의 진짜의미를깨우쳤다고했다. 김의원은“ � 구술생애사작업이 � 과거 를기록하는데서그치는게아니라다 음 세대로까지연구와 논의가 지속되 도록 돕는다는 걸깨달았다”며“자료 집을토대로할머니의이야기를이어서 연구하려는 다른이들의노력을 보면 서비로소위로를받은느낌이었다”고 전했다. 박씨에게는 ‘위안부’ 피해로인한 상 흔이곳곳에남았다.위안소첫탈출실 패직후일본군으로부터심하게맞은 다리부위를아직도아파하고, 불면증 도 심하다. 김의원은 박씨를 찾을 때 늘 케토톱 � 파스 � 과 청심환을 사간다. 그는 “할머니께서‘다리아프다’ ‘밤에 잘 몬 잔다’ 하시는 걸듣다보니, 언젠 가부터는 그때설움을 매번상세하게 말씀하기어려워돌려말하시는것처럼 들리더라”고했다. “’위안부’역사는이렇게변하지않고 남아있는데너무 안타깝죠.” 김의원 은 최근 ‘위안부’ 피해회복 운동을 향 한 혐오 세력이강해지는 것을 지켜보 는게괴롭다고 토로했다. 그는 “’위안 부’에대한 관심이뜸해지고왜곡된주 장이많아질수록 할머니와 가족이느 낄상실감이우려된다”며“혐오발언이 당장이들에게향하지않도록 막는게 시급하다”고강조했다. 인터뷰다음날인 19일김의원은기 자에게“할머니댁에왔어요”라는메시 지와함께동영상하나를보냈다.김의 원에게박씨가 사과를 깎아주며두런 두런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최 근 김의원은 박씨에게이렇게말했다 고한다.“할머니가그래고생했고이래 똑똑하니까 사람들이찾아오고 먹을 것도 주지. 할머니이거다 받을 만한 분이라서받는거예요.” 포항=최은서기자 구술생애사작업김은주포항시의원 대여섯번방문후마음열고증언 “사별후혼자자식둘먹여살리고 독학으로문맹탈출, 생활력자부 피해자라는단어에묶일분아냐” “위안부인권운동혐오세력강해져 혐오발언피해자겨냥막는게시급” �� �� � ������������������ ������������������ ����������������� ��� �� ��� ������������������������������������������������������ ����������������������������������������������� ������� ���������������������������������������������������������������������������������������� ���������������������������������������� ��������� ����������������� D10 기획 한국일보 광고문의 770. 622. 9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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