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5년 5월 9일(금) ~ 5월 15일(목) A10 연천경순왕릉. 첫 여정은 장남면의 한적한 언덕.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935~978년)가 잠든 연천 경순왕릉이다.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며 신라 천년 왕국의 막을 내린 그는 이후 고려 왕실의 신뢰를 받으며 개경에 머 물다 이곳에 묻혔다. 그의 묘가 왜 연천에 자리하게 됐 을까? 고려왕실은그를경주의신라왕릉들사이에묻지않 았다. 그의 운구가 임진강 고랑포 나루에 도착했을 때 몰려드는 신라 유민들을 본 고려는 백성의 동요를 우 려해 운구를 멈췄다고 한다.‘왕족의 묘는 개경 100리 밖에 둘 수 없다’는 명분 아래 이 나지막한 언덕에 그 를 눕혔다. 경주 봉황산이 아닌 철책선이 멀리 보이는 연천의구릉지에신라의마지막이잠든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오랫동안 방치됐던 이 무덤은 18세기 조선영조대에후손들이묘지석을발견해정비하면서 다시세상에드러났다. 조선후기로이어진왕릉양식 은경순왕의정체성과는어울리지않는듯하면서도묘 하게어울린다. 이질적이지만그래서더역사적인동이 틀무렵의경계같은풍경이다. 왕릉주변에는추정신도비가비각속에옮겨져있다. 본래 고랑포 초등학교 앞에 방치됐던 것을 1986년에 이곳으로이전한것이라고한다. 조각은 화려하지 않지만 석물의 기품은 오히려 이 능 의고요한위엄과닮아있다. 관리하고 있는 분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신라와 고 려를 잇는 역사적 장소를 다시 둘러본다. 능 주변에 피 어오른 진달래와 철쭉, 그 아래 불어오는 봄바람은 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마지막 신라왕의 침묵과 교차한 다. 가을에단풍이무덤을붉게휘감을때면그침묵은 더짙어지겠지. 경순왕릉에서차로 30분남짓, 두번째목적지는전곡 읍에 자리한 전곡선사박물관이다. 이곳은 단지 박물 관이아니라아시아선사고고학의물줄기를바꾼땅이 다.1978년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던 고고학 전공자 그 렉보웬이발견한아슐리안형주먹도끼는아시아에선 처음발견된것이라한다. 전곡리는 곧 세계 고고학계의 이목을 끌었고 기존 인 류이동경로에대한고정관념을뒤흔드는전환점이됐 다. 2011년 문을 연 전곡선사박물관은 이 유적을 영 구 보존하고 대중에게 열기 위해 세워졌다. 입구를 들 어서면넓고쾌적한공간에상설전시실과고고학체험 관, 그리고 실내외 놀이터가 어우러져 있다. 아이들은 뛰놀고어른들은진화의과정을따라걷는다. 주먹도끼를 들고 사냥을 상상하며 인간의 조상이 자 연과 어떻게 맞서고 적응했는지를 체험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물관을 나와 만나는 한탄강과 들 판은감탄을부른다. 물결이 흐르고 산책길이 이어진다. 강둑 옆에 마련된 야외 유적지는 실제 발굴 현장을 재현한 체험 공간으 로, 뼛조각과 석기 파편의 흔적들이 바람결에 이야기 를건넨다. 매년 봄이면 이곳은 한층 더 살아난다. 연천 구석기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다. 박물관 옆 들판은 활짝 열린 교실이자 놀이터가 되고 아이들은 불 피우기, 동굴 그 리기, 사냥 흉내 내기 등을 체험하며 구석기의 삶을 몸 으로 배운다. 책으로 배운 구석기가 이곳에선삶이 되 고놀이가된다. 광활한평지와맑은공기, 그리고사방 에서 들려오는 웃음 소리는 신라와 선사를 잇는 시간 여행의또다른길목이다. 작지만두터운도시연천, 신라가마지막을남기고인 류가첫발자국을새긴땅. 우리는그사이에서시간의 한복판을 걷는다. 역사의 갈피를 펼쳐 보이고 여행객 들은그페이지를손끝으로넘긴다. ●박윤정 (주)민트투어대표 프랑스에서 대학 생 활을 하며 유럽 여행 문화를 익혔다. 귀국 후 스스로를 위한 여 행을 즐기겠다는 마 음으로 2002년 민트 투어 여행사를 차렸 다. 20여년동안맞춤 여행으로 여행객들의 취향에 맞는 여행을 디 자인하고 있다. 2021년 4월 여행 책 ‘나도 한번은 트레 킹 페스티벌 크루즈’와 이듬해 6월 ‘나도 한번은 발트 3 국발칸반도’를쓰고냈다. 전곡선 사박물관 내부전시관. 서울에서차로한시간반남짓, 연천은가까이있지만쉽게들르지않는여행지다. 그러나이조용한접경도시에는한국사의시작과끝을품은두갈래의시간이 나란히흐른다. 하나는신라천년의마지막장면, 또하나는그보다훨씬오래전구석기의 여명이다. 연천으로향하는여정은인간의기억과시간을좇는문앞에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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