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5년 10월 17일(금) ~ 10월 23일(목) A10 새벽녘한남대교를건너며도시의불빛이서서히희미해 질무렵,서해의바람이길끝어딘가에서부른다.경부고속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논산천안고속도로를 지나 익산을 스쳐갈때쯤차창밖으로들판이펼쳐진다. 바람은벼이삭 을흔들며여름의잔향을날리고하늘은조금씩붉어진다. 서울에서약 3시간반, 그길끝에서군산은바다와기억이 만나는자리에서여행객을맞이한다. 군산은 한국 근대사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다. 일제강점기, 일본이조선의쌀을실어나르던대표항구였 다. 군산항에는쌀창고가줄지어서있었고, 그곁에는일 본 상인들이 머물던 상가와 가옥이 들어서 있다. 붉은 벽 돌, 짙은기와, 그리고오래된간판들. 이모든것이지금도 흔적을간직한채도시전체를거대한근대유물처럼만들 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군산은‘식민지의 잔상’만을 품은 도시가아니다. 이곳의거리를걷다보면시간이흐르고자 연스레바뀌며재해석된삶의온도가느껴진다. 옛조선은 행 건물은 지금‘근대건축관’으로 변했고 일본식 가옥들 은 게스트하우스나 카페로 다시 태어났다. 무거운 역사를 문화로전환시킨도시,이것이군산의매력이다. 월명산에서내려다본군산의풍경은참묘하다. 왼편으로 는바다가,오른편으로는논이펼쳐져있다.도시의끝과시 작이물결과흙사이에서맞닿아있는셈이다. 산아래에는 구불구불한골목들이이어지고, 그한가운데에군산의대 표관광지들이모여있다. 근대 역사박물관, 히로쓰가옥, 진포해양테마공원, 이성 당까지다둘러보면하루를꽉채워도어렵다. 이성당의단 팥빵을사기위해여전히긴줄이늘어서있고커피한잔을 들고근대거리의붉은벽돌길을걷다보면, 마치영화세트 장속을거니는듯한착각에빠진다. 이거리풍경은‘복원 된기억’이아니라실제살아온시간의흔적이다. 옛 시간의 기억을 찾아 초원사진관으로 향한다. 역사 속 장소는 아니지만 군산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영화처럼 머 물러 있는 장소다. 영화‘8월의 크리스마스’배경지로, 사 진사한석규와조용한미소의심은하가서로의마음을스 치던 곳이다. 1990년대 말 관객들은 이 사진관의 풍경을 통해‘사랑의유한함과기억의영원함’을느꼈다. 나역시 그시간들을떠올려본다. 사진관 앞 골목에 서면 그 장면이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 른다. 바닷바람이살짝불고오래된간판이삐걱거린다. 햇 살은유리창에부딪혀반사되고, 그안쪽에는옛카메라와 필름상자가놓여있다. 초원사진관이라는다섯글자는여 전히바래지않았다. 사진관주변의시간은마치필름속에 멈춘듯고요하고,그고요속에서한시대의감성이바람결 에남아있다. 지난방문추억을떠올리며옛시간들을되 새겨본다. 사진관은그대로인듯하지만스쳐지나간사람 들은세월을간직하며변하겠지. 근처사진관옆벤치에앉아커피를마신다. 한참을그렇 게앉아있자마치한석규가카메라를들고창밖을바라보 던장면이내앞에겹쳐졌다. 그때그감정의미세한진동이 세월을건너내마음속으로번져왔다. 군산에서첫날은과 거를담은채그렇게흘려보낸다. 다음 날 아침, 은파호수공원으로 향한다. 군산 시내에서 차로 10분남짓. 도시의북적임이사라지고잔잔한호수가 시야를가득메운다.‘은파’라는이름처럼호수위에는햇 살이반짝이며물결을은빛으로물들인다. 둘레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바람이 호숫가 갈대를 스 치고 산책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나무 데크 위에서 가볍게 울린다. 커플들이나란히걷고조깅하는이들은이어폰을 낀 채 리듬을 타며 스쳐 간다. 한쪽에는 벚나무가 늘어서 있어봄이면분홍빛터널이펼쳐진다고한다. 지금은초가 을,잎사귀끝에약간의붉음이스며있다. 호수 건너편 정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바람의 냄새를 들이마신다. 짭조름한바다냄새와시원한물비린향이섞 여‘군산의향기’가느껴진다. 도시는역사로가득하지만, 그한켠에이런고요한자연이있다는것이군산의또다 른매력이다. 군산의바다는늘조용하다. 큰파도대신잔물결이부서 지고, 그위로철새들이떠다닌다. 한때는수탈의항구였지 만지금은기억을품은도시로다시태어났다. 군산의거리 에는여전히‘시간의입자’가떠다닌다. 오래된건물, 사진 관의간판, 은파저수지의바람, 그리고빵냄새가스며있는 이성당의골목. 이모든것이합쳐져군산은하나의‘감정 의 도시’가 된다. 이곳에서는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 저‘머문다’.머무는동안과거와현재가조용히겹쳐지고 사람의마음이그틈을걸어간다. 돌아오는길, 차창에비친노을은바다위의기억처럼잔 잔했다. 군산은여행지가아니라기억의항구라는것을. 언 젠가 다시 그 바다로돌아가면 초원사진관에서 현재를 바 라보며과거기억속의모습을찾겠지. ●박윤정(주)민트투어대표 프랑스에서 대학 생활 을하며유럽여행문화 를익혔다. 귀국후스스 로를 위한 여행을 즐기 겠다는 마음으로 2002 년 민트투어 여행사를 차렸다. 20여년동안맞 춤 여행으로 여행객들 의 취향에 맞는 여행을 디자인하고있다. 2021년 4월여행책‘나도한번은트레킹페스티벌크루즈’와이듬해 6월‘나도한번은발트3국발칸반도’를쓰고냈다. 군산서살아있는시간을찾는다 군산도심풍경.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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