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6년 3월 20일(금) ~ 3월 26일(목) A9 여행 거북선이처음나선바다 사천만에 도착하면 바다가 먼저 말을 건 넨다. 넓고 잔잔한 물결 위에 겨울 햇빛이 부드럽게내려앉아있다. 방파제 끝으로 걸어가면 안내판 하나가 눈에들어온다.“거북선최초출전지-사천 해전.”문장은짧지만, 그뒤에는긴시간이 서있다. 1592년 임진왜란. 일본군은 바다를 통해 병력과물자를이동시키고있었다. 조선수 군이이를막아내지못했다면전쟁의흐름 은전혀다른방향으로흘렀을지도모른다. 이순신장군이지휘한조선수군은남해곳 곳에서해전을벌였고,그가운데하나가바 로이곳사천해전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함대를크게격파하며전세를뒤집는 중요한승리를거뒀다. 지금의바다는놀라 울 만큼 평온하다. 잔잔한 수면 위로 작은 어선이천천히지나간다. 그러나이곳이한때전쟁의현장이었다는 사실을떠올리면, 풍경은조금다르게보인 다. 바람이스치는소리사이로, 수백년전 화포의 울림이 희미하게 겹쳐지는 듯하다. 바다는말이없다.그러나가장오래된기억 을간직한장소다. 바다·땅이만나는지도 ‘사천만갯벌’ 사천만의 또 다른 얼굴은 갯벌이다. 물이 빠진자리에는넓은진흙평야가펼쳐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풍경처럼 보이지만, 조금 만자세히바라보면그안에수많은흔적이 보인다. 게의 작은 발자국, 조개가 숨 쉬기 위해 만든 구멍, 그리고 철새들이 남긴 흔 적까지.갯벌은사실하나의생명의지도다. 바다가잠시물러난사이, 바다속세계가 모습을드러낸다. 겨울햇빛아래에서갯벌 은유난히고요하다. 여름처럼 많은 사람이 오가지 않기 때문 에풍경은더차분하다.멀리시선을보내면 또다른장면이겹쳐진다. 바다너머로흐릿 하게지리산능선이떠오른다. 지리산은한 국에서가장깊은산가운데하나다. 그산이남해의바다뒤에서조용히서있 다. 바다와산이한화면안에서만나는풍 경. 이 장면은 남해안이 아니면 쉽게 만날 수없다. 바다와함께살아온방식 ‘석방렴’ 사천만 바닷가에는 돌을 쌓아 만든 구조 물이하나서있다. 원뿔모양으로높이쌓 아올린돌탑, 그리고그옆에놓인안내판. 이름은 석방렴이다. 석방렴은 남해안 전통 어업방식이다. 바다에돌이나나무로울타 리를만들어조수간만의차를이용해물고 기를잡는장치다. 밀물이들어오면물고기 가자연스럽게그안으로들어오고,썰물이 빠지면물고기는밖으로나가지못한다. 인간이 자연을 억지로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돌탑 옆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남해 사 람들이바다와함께살아온시간의깊이가 느껴진다. 요즘관광지에서흔히볼수있는 포토 존인 하트 모양의 프레임, 무지개 색 구조물, 그리고알록달록한조형물들을뒤 로하고사천을떠나고성으로향한다.프레 임이없어도사천만의바다는이미충분히 아름답다.풍경은완성돼있다. 지역의기억담은 ‘고성박물관’ 고성박물관 앞에 서면 둥근 형태의 건물 이먼저눈에들어온다.벽돌색외벽이햇볕 을 받아 따뜻하게 빛난다. 이 박물관은 지 난해11월긴준비끝에재개관했다.지역의 선사시대부터가야문화, 조선시대까지이 어지는 역사를 새롭게 정리해 선보이고 있 다. 지역 박물관이 가진 힘은 규모가 아니 라맥락이다. 이곳에서는한지역이지나온 시간의흐름을이해할수있다. 가야의언덕‘송학동고분군’ 박물관에서 조금만 이동하면 송학동 고 분군이 나타난다. 언덕 위에 둥근 봉분들 이이어져있다. 멀리서보면부드러운잔디 언덕처럼보이지만, 가까이다가가면그아 래에 묻힌 시간이 느껴진다. 약 1500년 전 가야시대의무덤이다. 가야는철의문명으 로성장한고대국가였다.낙동강유역을중 심으로 형성된 여러 세력들은 해상 교역을 통해일본과중국까지연결됐다. 이고분군은그가야문화의중요한흔적 가운데하나이며,최근가야고분군이유네 스코세계유산으로등재되면서더큰의미 를갖게됐다. 고분사이를걷는겨울오후,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겨울 풀은 황금빛으로 마른 채 바람에 흔들리고, 하 늘은 낮고 넓다. 남해에서 시간이 쌓여 만 들어진풍경을깨닫는다. ●박윤정(주)민트투어대표 프랑스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유럽여행문화를익혔 다.귀국후스스로를위한여 행을즐기겠다는마음으로 2002년민트투어여행사를 차렸다.20여년동안맞춤여 행으로 여행객들의취향에 맞는여행을디자인하고있 다.2021년4월여행책‘나도 한번은트레킹페스티벌크루즈’와이듬해6월‘나도한 번은발트3국발칸반도’를쓰고냈다. ‘바다의기억’ 따라사천에서고성까지 남해풍경. 김포공항출발장은아직완전히밝지않은하늘아래에서분주하게움직이고있었다. 여행가방을끌고지나가는 사람들발걸음사이로, 남쪽으로향하는비행기의탑승안내가조용히울렸다. 사천으로가는비행은길지않다. 한시간남짓, 비행기가구름위로올라서자수도권의회색빛도시가천천히뒤로밀려난다. 창문아래로한반도의 산맥이이어지고, 어느순간바다가나타난다. 남해다. 사천공항활주로에내려앉는순간, 공기의결이달라진다. 서울의겨울보다조금더부드럽고, 바람에는바다냄새 가묻어있다. 공항은작고조용하다. 여행의시작이과장되지않아좋다. 차에올라사천만을향해달린다. 도로는 붐비지않는다. 잎을모두내려놓은산자락과낮은햇빛, 그리고바다로이어지는길. 이곳의겨울은화려하지않 다. 그러나그래서더깊다. 석방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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