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전자신문

2026년 4월 17일(금) ~ 4월 23일(목) A4 물길이만든섬 ‘청령포’ 청령포로 들어가는 뱃머리에서, 영화와 현실의경계는흐릿해진다. 몇분이면건널 수있는거리지만,그시간은단순한이동이 아니라 시대를 건너는 통로처럼 느껴진다. 물이 갈라지는 소리, 낮게 스치는 바람, 그 리고강위에떠있는침묵. 모든것이느리 게흐른다. 이 짧은 이동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감 정의이동이다. 왕이었던한인간이‘혼자’ 가되는순간으로이어지는길이다. 남한강 은 이 땅을 감싸며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오히려인간을고립시키는경계가된다. 숲은깊고고요하다. 그러나그고요는자 연의 것이 아니라, 역사가 남긴 침묵이다. 사람이떠난자리에서시간이멈춰선듯한 감각. 청령포는그렇게‘정지된시간’의공 간으로남아있다. 말을하지않는증언자 ‘관음송’ 청령포 깊숙한 곳에는 한 그루의 소나무 가 서 있다.‘관음송’. 이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아니다. 역사를지켜본존재로기억 된다. 한쪽 가지가 유독 아래로 길게 굽어 있는데, 사람들은 말한다. 어린 왕이 그 아 래에서 눈물을 흘릴 때, 나무가 몸을 숙여 그의슬픔을들어주었다고.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중요한것은사람들이그이야기를믿 고싶어했다는점이다.역사는기록으로남 지만, 감정은 전설로 남는다. 관음송은 그 경계위에서있다. 나무의 표면을 따라 흐르는 시간의 결을 바라보고있으면, 인간의시간은얼마나짧 은가를 깨닫게 된다. 왕조도, 권력도, 이름 도모두사라지지만, 이나무는여전히같은 자리에서시간을견디고있다. 시간이왕을다시부르는곳 ‘장릉’ 청령포를 떠나 도착한‘장릉’은 단종이 잠든곳이다. 그는생전에왕의자리를잃었 고, 죽은 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그 이름을 되찾았다. 장릉은 그 늦은 복권의 공간이다. 주위는 조용하고 단정하다. 감정은 과장 되지 않고, 오히려 천천히 가라앉는다. 능 앞에서면복잡한역사적사건들은하나의 문장으로정리된다.왕이었던인간.그문장 은설명이아니라이해에가깝다. 영화가감 정을 끌어올린다면, 이곳에서는 감정을 가 라앉힌다. 시간은모든것을단순하게만든 다. ‘단종역사관’ 그림속에남은얼굴 ‘단종 역사관’에 들어서면, 역사는 다시 한번해석된다. 특히계단에걸려있는운보 김기창작품은발걸음을멈추게한다. 그가 그린단종의얼굴에는분노가없다.대신깊 은고요가있다. 영화 속 왕이 감정을 터뜨리는 순간이 있 다면, 이그림속왕은이미모든것을받아 들인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같은 인물 이지만, 전혀 다른 해석. 그 미묘한 표정에 서역사와인간을동시에이해하게된다. 바람이지나가는자리 ‘관풍헌’ 여정의마지막,‘관풍헌’을찾는다. 마루위 에앉으면바람이스쳐지나간다. 특별할것 없는 바람이지만, 이곳에서는 그 의미가 달 라진다.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마치 시간을 건너온 흐름처럼 느껴진다. 어린 왕은 이 자 리에서무엇을생각했을까? 강과산, 그리고 자신이잃어버린것들을바라보았을것이다. 권력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게 되는 역설. 이곳에서 그 마지막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영월의 여정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이어진다. 그 모든 흐름 위에 한 편의 영화가 겹쳐진다. 그러나 영화는 끝나 도, 이곳의 시간은 끝나지 않는다. 먹먹함만 이돌아오는길위에서도조용히이어진다. ●박윤정(주)민트투어대표 프랑스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유럽여행문화를익혔 다.귀국후스스로를위한여 행을즐기겠다는마음으로 2002년민트투어여행사를 차렸다.20여년동안맞춤여 행으로 여행객들의취향에 맞는여행을디자인하고있 다.2021년4월여행책‘나도 한번은트레킹페스티벌크루즈’와이듬해6월‘나도한 번은발트3국발칸반도’를쓰고냈다. 단종의슬픔따라걷는 ‘영월의여정’ 청령포. 강원도영월로향하는길은단순한여행이아니다. 그것은한인간의운명이국가의역사로확장되던순간 으로되돌아가는일이다. 산을감아도는길끝에서, 남한강물줄기가세방향으로감싸안은작은땅이모 습을드러낸다. 그곳에서단종은유배됐다. 왕의자리에서밀려난뒤, 그는더이상왕이아니었고, 그렇다 고완전히평범한인간으로돌아갈수도없었다.‘청령포’는그런경계의공간이다. 권력과인간사이, 역사 와감정사이에놓인자리. 최근 1600만관객을넘기며화제가된영화,‘왕과사는남자’는‘왕’이라는존 재를권력의상징이아닌인간의슬픔으로끌어내린다. 이작품은권력의본질과인간의좌절을동시에드러낸 다. 영화속에서가장조용하지만깊은울림을남기는인물역시어린왕, 단종이다. 화려한궁궐이아닌, 권력에서 밀려난존재로서의왕. 그서사는영월에서비로소현실이된다. 장릉. 관풍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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